국토종주자에게는 걷는 것이 일이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그 사이의 긴긴 시간을 걷기로 주로 채우게 된다. 다리를 움직이는 이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는 동안 머리로 주로 하는 일은 생각이다. 인류 역사상 산책 중에 떠오른 위대한 개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걸음이란 사색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 준다.
하지만 생각하는 일이 이내 지루해진다면? 생각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서 생각을 안 하고 싶으면 생각을 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많은 나도 하루 여덟 시간씩 걷고 있으면 이 재미난 과업에 흥미를 잃게 되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걷기에 국토종주는 대단히 괴로운 과정이기에 고통을 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핸드폰 속에 있는 재미난 세계를 애써 외면하는 동시에 걷기의 지난함을 잊을 수 있게 해 준 내 별 것 아닌 비법을 여기에 공개한다.
1. 눈 감고 걷기
10년 전 국토종주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방법. 눈을 감고 최대한 똑바로 걸어 나가는 데에 집중한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대각선으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이 일의 묘미. '좋아, 이번에는 정말 집중해서 좀 더 직진해 본다!' 하는 다짐을 반복하며 걷다 보면 진도를 많이 뺄 수 있다.
단, 뻥 뚫려있는 길에서 향후 10분간은 차나 자전거, 또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 때만 시행한다.
2. 가까운 마을 식당, 숙소 찾아보기
지도 어플을 열어 줌을 당기고 밀며 근처 어디에 마을이 있는지, 얼마나 걸어야 도착하는지, 경로에서 많이 멀지는 않은지, 들러볼 만하다면 무엇을 먹을지, 가격은 얼마고 메뉴는 무엇이 있고 오픈 시간은 어찌 되며 사람들이 남긴 후기가 있는지 등을 찾아본다. '몇 분만 더 걸으면 맛있는 무엇 무엇을 먹을 수 있다!' 하는 희망이 생기면 발의 고통도 잊어볼 만하다. 가게가 문을 닫았다던지 재료가 떨어졌다던지 해서 이렇게 정해둔 메뉴를 실제로 먹은 적은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그냥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였달까.
3. 노래 부르며 걷기
이 역시 10년 전 국토종주 때 즐겨 써먹었던 콘텐츠. 어색해서 혼자 있을 때 혼잣말도 잘 안 하는 나이기에 국토종주 초반에는 괜히 쑥스러운 머릿속으로만 노래를 하다가 경상도 어드메에서 지루함이 부끄러움을 이기면 가수라도 된 양 열창을 하는 것도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문제는 내가 가사를 다 외운 노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 구절만 무한 반복해서 부르곤 한다. 레퍼토리도 많지 않아서 '낭만 고양이', '오리 날다', '1분1초', '일탈', '스물다섯스물하나' 등을 부르고 또 불렀다.
4. 숫자 세면서 걷기
정말 너무 힘든데 걸어야만 할 때 즐겨 쓴 방법이다. 중간 목적지까지 1km가 남았다면, 한 걸음에 1m라고 치고 1000을 세며 걷는다. 중간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숫자를 세는 데 집중하다 보면 잠깐이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다. 한 걸음이 1m가 채 안 되는지, 숫자를 다 세고 목적지에 도착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부쩍 나아간 나 자신을 확인하며 토닥이기에는 충분한 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