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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Aug 18. 2024

설 만찬으로 한우를 먹고 싶다

국토종주 9일 차, 의성 구간


설 연휴 첫날 아침. 날이 꽤나 쌀쌀해서 냉큼 장갑을 꺼내 꼈다. 식당이 있는 동네까지는 거리가 꽤 있는 데다 가야 하는 방향과는 반대였기에 편의점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들른 김에 간식 봉지도 좀 채워 넣고. 한번 먹어본 적이 있는 카구리와 난생처음 보는 밀양돼지국밥라면 중에 고민하다가 '그래도 경상도에 왔으니 지역음식(?)을 먹어보자!' 하며 밀양돼지국밥라면을 선택했다. 그래도 명색이 명절인데 맛이 없으면 꽤나 슬프겠군...이라 생각했으나 감칠맛 나는 국물에 가느다란 면발이 제법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갈 힘이 생겼다.



산양교를 건너서 구미보를 향해 간다. 어제 여정을 일찍 마쳤으니 오늘은 낙단보까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걸어본다.



잘 닦여 있지만 좀 돌아가야 하는 길과 험하지만 빨리 질러가는 길이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는 항상 후자다. 험한 길 오히려 좋아. 새롭고 재밌잖아요.



종주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괜스레 민망해서 하지 못하던 노래 부르기. 구미쯤 오니 가능해졌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뭐. 선우정아의 <고양이>, 그리고 옛날옛적 첫 연애하던 시절 남자친구와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곤 했던 이름 모를 듀엣곡을 반복해서 불렀다. 나는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어서 항상 무한 구간반복을 해야 한다. 이게 뭐 공연도 아니고 나만 재미있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물 위를 걷는 기분을 낼 수 있는 데크길. 아니, 이걸 데크라고 불러도 되나? 데크는 뭔가 나무로 만들어져야 할 것 같은데.



집 나온 지 열흘 째. 250km를 걸어왔다. 내가 내 두 다리로 250km를 걸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놀랍다. 며칠 더 걸으면 여정의 반을 지나게 된다. 기대되는구먼.



강을 따라 걸어서인지 이날 유독 새를 많이 보게 되었다. 나만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들도 나를 본다. 그냥 지나만 가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포르륵 날아가곤 한다. 참새나 뱁새처럼 겁이 많은 새들은 길 양 옆 나무에 잔뜩 숨어 앉아 있다가 내가 지나가면 떼 지어 푸르르 날아오르기도 한다.



뭐야 저 새는 왜 저렇게 커. 오리배야? 하고 놀라서 쳐다봤는데 얼마 안 가 친절하게도 '큰고니'라는 설명판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크긴 크구먼요.


나를 보고 등을 보이며 헤엄쳐 가는 물새들을 보며 상처받을 뻔. 아니 어쩌면 내가 그들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한 것일 수도 있겠다. 새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탐조의 제1 원칙인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그냥 내 길을 걸어갈 뿐인걸. 새들도 내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니 날지 않고 헤엄쳐가는 것이겠거니 한다.


생각해 보니 물새들은 육해공 모두를 누빌 수 있구나. 사실상 지구 생물들 중 최강자가 아닌가 싶었다.



없는 중앙선을 누가 만들어 놓았다. 위치와 간격이 너무나도 적절해서 이게 물이 맞는지, 영구적인 표시는 아닌지 궁금해졌다.



길동무가 다 된 축사의 소들. 축사 근처에 가면 소똥 냄새가 진하게 난다. 시골살이 경력으로 면역된 덕분으로 그리 괴롭지는 않다. 도시에만 살아본 사람은 국토종주 할 때 좀 더 불편하려나?



자전거쉼터가 있길래 잠깐 앉아 쉬었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몸이 쑤셔서 잠깐 누워 눈을 붙였다. 이따금 자전거가 지나갔지만 딱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길바닥 생활에 면역되었나 보다.



겨울 종주의 장점은 철새를 포함해서 새를 많이 볼 수 있다는 것. 이따금 탐조할 수 있는 망원경들도 놓여 있다. 물론 이걸로 뭔가 발견한 적은 없다.


나뭇가지에 걸린 해


전날 노숙 목적지로 잡았던 청소년수련원을 지나가게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낡은 것이 거의 폐가 수준이었다. 여기에서 잤으면 좀 섬뜩했을지도. 구미공단에서 묵은 덕분에 컨디션도 좋은 편이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만 좀 쓰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잠겨 있었다. 하지만... 바로 길가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이 무성한 풀과 거미줄로 뒤덮여 너무나도 험했던 탓에 잠겼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여기에서 엉덩이 깔 자신 나는 없다네...



고라니 목격. 10년 전 종주할 때는 꽤 많이 봤고, 우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이번 종주 때는 어째 보이질 않더니 이제 두 번째로 만났다. 펄쩍펄쩍 뛰어 재빠르게 사라지는 고라니. 너는 어쩜 그렇게 빠르니. 너처럼 가면 서울 금방 가겠다 야. 살다 살다 고라니를 부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멀끔한 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다. 고작 거미줄 없는 화장실 하나 발견했다고 행복해지는 생활이라니. 이게 수련이 아니면 무엇이 수련이란 말인가.



걷다 보면 나무에 하얗게 뭐가 많이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새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언제나 비닐이다. 근처 논밭에서 찢어진 농업용 비닐이 날아다니다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마음 아픈 광경이었다.


전날 지도에 모텔로 표시되어 있었던 곳을 지나가는데 아무것도 없는 산중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걸 믿고 밤길 걸어 여기까지 왔다면 얼마나 허탈했을지. 여러모로 어제 구미에서 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누가 표지판에 갈대를 이렇게 꽂아 놨다. 한 번도 아니고 지나가는 동안 계속 보였다. 똑같이 꽂은 것도 아니고 꽃꽂이를 하듯이 개수도 모양도 다 다른 채였다. 덕분에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디까지 꽂혀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구미보가 보인다! 발목이 아파 힘들었던 와중이라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방방 뛰며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에너지가 없어서 참았다. 밥다운 밥 먹고 싶다!



드디어 구미보에 도착했다. 구미보는 나에게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10년 전 종주할 때 낙단보에서 묵은 민박 사장님이 점프(차를 타고 구간을 건너뛰는 것)를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원치 않았음에도 '에이 다들 이렇게 해~' 하고 밀어붙이셔서 결국 낙단보-구미보 사이 구간을 점프했다.


차에서 내리고 마음이 무거워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다. 그 죄책감은 그날 하루종일, 종주가 끝날 때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 종주를 '우회하더라도, 쉬어가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 발로' 하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이제부터는 그때 걷지 않은 길을 걷게 된다. 10년 전 나를 위해서, 더 이상 마음 불편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듯이.



와중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으니 예의상 한번 들러 준다. 손이 시리지만 비누로 싹싹 깨끗이 닦는다. 비누 같은 문명의 이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잘 없기에.


쉼터에 앉아 쉬면서 오후 계획을 점검했다. 오늘은 낙단보까지 무난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낙단보 앞에 큰 마을이 있으니 거기서 자고, 맛있는 것도 먹어야지. 한우타운과 오리주물럭 집이 있어서 뭘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자전거길을 벗어나 마을을 잠깐 가로지르게 됐다. 학교 앞 문구점이 사라지는 추세였던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최근 무인점포로 하나둘 다시 생기는 중인 것 같다. 이런 수퍼와 문방구 감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길 가나 만난 개들. 그러라고 키우는 것이겠지만 너무 시끄럽게 짖어서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의성에 도착했다! 전날 쉰 덕분인지, 아니면 걷는 것도 요령이 생기는지, 다리가 예전처럼 많이 아프지 않다. 해 질 녘 느낀 왼발 안쪽 쑤심이 이날 처음으로 느낀 발 통증이었다. 그것마저 금세 사라졌다. 걷는 일에도 인이 박이는 모양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괴롭히는 풀씨들. 10년 전에는 막사리 씨가 그렇게 붙더니 이제는 도깨비바늘이 훨씬 더 많이 붙는다. 고라니도 그렇고, 생태도 조금씩 바뀌는구나 싶어 새삼 신기하다.



이때까지는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숙소까지 한참 남았는데 어쩌지' 하며 초조해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날은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채였다. 종주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희망찬 기분이 드는 저녁이었다. 빨리 도착해서 한우나 오리고기를 사 먹을 생각에 신나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정말 낙단보가 코앞. 네이버 지도에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계속 찍어보며 남은 예상 시간이 한 시간에서 삼십 분으로, 삼십 분에서 십 분으로 줄어드는 것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됐다.



드디어 낙단보 도착. 한우 식당이 몰려 있는 동네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거리가 숙소와 꽤 멀어서 일단은 경로에 있는 오리고깃집을 공략했다.


한 명도 식사되는지를 물으려고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한눈에 봐도 분주해 보이는 사장님이 '오늘은 예약이 너무 많아서 예약 안 하시면 식사가 안 돼요' 하신다.


근처에 장어구이집이 있어서 그곳도 들러 봤지만 오늘은 아예 영업을 안 하신다고. 설 연휴이다 보니 아주 바쁘거나 장사를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역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 없구만.



결국 한우와 오리 둘 다 포기하고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먹기로 했다. 힘든 줄 몰랐는데 앉으니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30.5km나 걸었는데 다치지도 까라지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뿌듯한 하루다.


오래 걸리지 않아 불향이 가득 나는 제육볶음이 서빙되어 왔다. 뜨끈뜨끈한 흰쌀밥,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소금김에 나물과 콩나물국,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고기 두툼한 제육볶음까지. 나는 정말 며칠 굶은 사람이라도 된 듯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그러고 보니 이날 밥다운 밥을 먹은 게 처음이었다.



배를 퉁퉁 두드리며 숙소로 향했다. 모텔이 네 개 정도 있었는데 개중에 저렴한 곳으로 골랐다. 방마다 개인 주차공간이 있는 무인텔이었는데 이런 곳은 처음이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니 사장님이 방법을 알려주셨다.



고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럭저럭 깨끗하고 괜찮았다. 바람 때문인지 문이 자꾸만 덜컹거리는 걸 빼면... 누가 들어올까 봐 불안해하며 쉬어야 했다.


그나저나 생리는 대체 왜 안 끝나는 걸까. 보통 사흘이면 끝나고도 남는데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 몸이 힘들어서 그런가. 다음날은 민박에서 잘 예정이라 빨래를 할 수 있으므로 매일 속옷을 갈아입는 국토종주 FLEX를 하려고 했는데, 생리가 안 끝나서 생리대를 뗄 수가 없었다.




근육을 풀어주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다. 열심히 산 자에게 보상을. 다음날도 열심히 걸어보자고 다짐하며 따끈한 방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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