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째 반복 중인 하루 일과를 또다시 열었다. 충청도에 진입하니 만나는 장면들이 사뭇 다르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호스텔을 발견했다. '자전거' 슬로건을 걸어둔 것을 보니 종주자들도 자주 이용하는 숙소인 모양이다. 어제 알았다면 여기에서 잤을 텐데 아쉬웠다.
걷다가 아침 8시 반부터 여는 꽈배기집도 만났다. 스트레스받으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안 좋은 습관, '배달음식 왕창 시켜서 꾸역꾸역 먹기' 때문에 어젯밤에 꽈배기를 왕창 시켰는데, 다 먹지도 못하고 눅눅해진 꽈배기를 들고 다닐 처지라 더욱 후회가 됐다. 좀 참았으면 아침에 갓 튀겨서 따끈따끈한 꽈배기 먹는 건데. 고쳐야 할 습관이다.
국토종주를 하고 있다고 해서 평소의 안 좋은 습관이 잠재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꺠닫는다. 특히나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은 더욱 그렇다. 몸도 마음도 힘드니 자꾸만 약해지고 의지를 잃어버린다. 도파민이 필요할 때 찾던 핸드폰도 이날만은 최대한 보지 않고 걸어보자고 다짐했다.
탄금 무술공원을 지나간다. 10년 전 이곳에 도착해서 '오늘도 해냈다!'하고 안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멀지 않은 다이소에 들러서 일회용 우비를 샀던 사소한 장면까지도.
탄금대 인증도 완료! 이로써 새재길 걷기가 마무리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한강자전거길에 진입한다! 한강만 정복하면 이번 국토종주도 완성이다. 왠지 발걸음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공원에서 아침 산책을 하는 동네 주민들의 대화에서 '했어유~' 하는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경상도에서는 자주 듣던 사투리를 언젠가부터는 듣기 어려워진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 건재하게 쓰이고 있음을 확인하니 왠지 마음이 놓인다.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는 젊은 사람들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강원도와 충청도는 그 경향이 비교적 옅은 것 같다. 서울이랑 가까워서인가? 충청도 사람으로서 충청도 사투리가 오래오래 전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도 부러 사투리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충청도가 고향이 아니신 데다가, 유년기에 만난 사람들, 선생님과 친구들 중에서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네이티브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쉼터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아주머니 두 분의 충청도 사투리 회화 능력이 내심 부러워졌다.
아름다운 남한강
어딘가에서 자꾸 어마어마하게 큰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기차길래 이렇게 시끄럽나 했는데, 여덟 번째쯤 들으며 알아챘다. 그것이 제트기 소리라는 것을. 근처에 비행장이 있는 모양이다 했다. 이렇게 자주 비행을 하면 주민들은 시끄러워서 어떻게 사나?
길 건너에 나래복권이 있길래 참지 못하고 들어가서 자동 한 장을 샀다. 인생역전 믿습니다. 나래의 힘 믿습니다. (5등도 못하고 낙첨됐다)
이 사진 찍었던 장소를 못 찾아서 비슷한 기둥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찾았다. 이제는 낙동강 하구둑까지의 거리를 재는 것이 아니라 한강 하구둑까지의 거리를 잰다. 많이 왔다!
강 건너에 숙박업소가 의외로 많아서 조금 후회했다. 어제 여기까지 와서 잘걸. 아침으로 꽈배기를 먹었더니 어째 허전한 것이 곡기가 필요하다 싶어 백반집에 왔다. 영업시간 정보도 없고 주변이 공사판 분위기라 열었으려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열려 있었다.소금김에 계란후라이 그리고 흰쌀밥은 역시나 치트키. 내가 좋아하는 김치콩나물국까지 있어서 신명 나게 먹었다.
식사를 하며 오늘의 목적지를 검색했다. 다음 인증센터인 비내섬까지는 무조건 갈 수 있을 것 같고, 어디서 자느냐가 문제인데... 어쩜 이렇게 잘 데가 없을까. 숙소가 떠서 흥분하며 눌러보면 독채펜션인 경우를 하도 많이 겪어서 독채펜션 알레르기가 생길 지경이었다. 하긴 요즘에는 여행을 가면 이런 예쁜 숙소에서 주로 묵으니 모텔들이 사라져 가는 것도 이해는 된다. 캠핑장도 제법 많은데, 텐트라도 메고 다녔으면 숙박 걱정을 좀 덜 했으려나. 여장을 푸는 그곳이 숙소가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짐도 무거운데 텐트에 침낭까지 메면 이 속도로는 절대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숙소 검색으로 돌아가 본다. 10년 전에 숙박했던 능암온천 찜질방은 루트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서 내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먼 곳에 부론장이라는 모텔이 있는데 자전거 종주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듯했고 별점도 좋았다. 루트 안에 있는 숙소라 여기까지 걸으면 진도도 더 뺄 수 있었다. 좋아, 오래 걷긴 해야겠지만 여기까지 가 보자. 결의를 다지고 일어났다.
계산해 주신 분이 커피 마시고 가라고 하셔서 평소에 잘 안 마시는 커피를 뽑아 들고 나왔다. 힘내야 하는 하루니까 한 잔 마셔줘야지. 아침에는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더니 날이 개면서 더워지기까지 했다. 반팔도 가능할 것 같은 날씨. 지구온난화의 시대에 겨울 국토종주 하려면 안에 입는 옷으로 반팔 한 벌은 필수일 듯.
우비 입은 사람들처럼 다듬어 놓은 나무들
오늘도 텅 빈 공간들을 보며 걷는다.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여백들.
무덤들과 함께하는 메멘토 모리여행. 죽은 뒤 남겨질 내 육신은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무덤이든 납골당이든, 죽은 뒤에도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누군가 끊임없이 그것을 돌봐줘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살아있는 동안 충분히 즐겼을 테니, 죽은 뒤에는 이 세상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넘겨주고 떠나고 싶다.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들뿐인데 나무에 붙어 서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과수원의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뭘 하고 있나 궁금하던 차에 힌트를 얻었다. 아마도 궤양 제거라는 과업 중이었던 듯.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로 바로 옆에 딸기라떼를 파는 카페가 있어 들어와 보았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치는 법이죠. 핸들, 시트 등 자동차 부품을 떼어서 인테리어를 한 독특한 카페였다. 딸기라떼는 딸기우유를 탄 듯 맛이 없어서 반도 못 먹었고, 딸기케이크는 대체 언제 만든 것인지 위에 올린 딸기는 말라 삐들어졌고 안에 들어간 딸기는 물러져서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입맛만 버렸다.
이 날따라 자전거전용도로 구간이 많지 않아서 국도 갓길로 오래 걸어야 했다. 가끔 차 오는 소리가 들리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에 좀 피곤한 조건이다.
수석이 유명한 지역인지 수석원이 여기저기에 많았다. 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사업을 탄생시킬 수 있는지,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린이보호 아니고 노인보호. 지금은 낯설지만 점점 더 많아지겠지
걷다 보면 재미있는 동네 이름들을 자주 마주친다. 막흐르기라는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니 정말로 막 거칠게 흐르는 여울이라 막흐르기라 불렀다고. 직관적인 이름이다.
이때껏 안 보이던 도꼬마리들이 잔뜩 붙었다. 풀씨도 지역마다 마켓셰어가 다른 걸까?
날이 따뜻해서인지 2월인데도 벌레가 많이 보인다. 나비도 날아다니고 파리와 벌도 자주 만난다. 땀을 잘 안 흘리는 편임에도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지구 온난화 이대로 괜찮은가.
충주시의 마스코트는 수달인가 보다. 상주에서 만난 귀여운 감 마스코트들이 생각났다. 많은 지역을 넘나드는 국토종주의 또 다른 재미.
부들만 보면 괜히 입에 한번 넣어보고 싶다. 절대 하지 말라는 영상을 그렇게 봤는데도 굳이 한번 해보고 싶다. 정말 매력 있게 생긴 식물이라고 생각한다.
해가 슬슬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어제 일찍 시마이 한 덕분인지, 아니면 점심에 마신 커피 덕분인지, 왠지 별로 힘들지가 않다.
문득 궁금해졌다. 스무 살의 나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이걸 왜 시작했니? 이 여행에서 무엇을 찾고 싶었니? 서른의 나는 너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데, 스무 살의 너는 어쩌다가 이 여정을 개척하게 된 거니?
나는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게 되었지만, 당시에 남겨둔 글과 사진들을 통해 대략 어떤 속셈이었는지 기억을 더듬는 건 가능하다. 그때의 나에게는 대의 따위 없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고, 하다 보니 끝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번 여정을 시작한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재미있게 살아야 할까, 가치 있는 일을 하며 멋지게 살아야 할까'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지금은 이 질문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재미를 좇다 보면 가치 있는 성공을 이루어내게 되리라고. 모두에게 해당되는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한번 살아보려고 한다.
여섯 시 반, 해가 거의 떨어졌을 즈음에 비내섬쉼터에 도착했다. 10년 전 들렀다가 사장님이 어린데 고생한다고 큼지막한 냉동 머핀을 네 개나 싸 주셔서 찜질방 온돌에 녹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도며 스카프며 이것저것 챙겨 주셔서 감사했기에 다시 뵈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저녁을 못 먹어서 뭐라도 사 먹을까 했는데 텄다.
아무튼 비내섬도 인증 완료.
이제는 숙소를 결정할 때. 이미 해가 거의 떨어졌지만, 낮에 목표했던 대로 부론장까지는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비내섬에서 부론장까지는 13km, 까라지지 않고 걸으면 3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다. 빨리 걸어도 밤 10시에 도착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이제 후퇴란 없다.
해가 졌다. 원주까지는 산길이었다. 초반에는 전원주택단지가 늘어서 있는 길이라 가로등도 있고 걸을만했다. 개들이 엄청 짖는다는 것만 빼면. 정말 민망하리만치 짖어대는데 이 개가 짖으면 저 개도 짖고 심지어는 강 건너편에 있는 집에서도 개가 짖어서 당황스러웠다. 개는 차가 지나갈 때는 안 짖기 때문에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주민들을 괜히 놀래키는 것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지니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소에 호흡보다 높은 빈도로 생각을 하는, 말 그대로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인간인지라 이런 머릿속 침묵이 낯설면서도, 필요한 상황에서는 놀랍도록 침착해지는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꼈다.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밤길을 걸었던 10년 전과 대비가 되어 더욱 그랬다.
낮에는 좁은 갓길을 걷는 동안 부디 차가 지나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어쩌다 한 번씩 지나가는, 어마어마한 양의 빛을 몰고 오는 차라는 기계의 존재가 너무나도 소중해졌다. 가뭄에 콩 나듯 하나씩 있는 가로등 역시 숭배하고 싶을 정도가 되었다. 아무리 담력이 좋아졌다 해도 어둠을 등지고는 도저히 쉴 수가 없어서 가로등을 만날 때마다 악착같이 쉬어 주었다.
이 사진은 걷고 있는 내 뒷모습이다. 핸드폰 플래시가 닿지 않는 곳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국도 갓길 걷기가 끝나고 자전거전용도로로 진입했다. 자전거도로는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악화되었다. 주변에 찻길도 민가도 없고 정말 산과 강, 길 그리고 나뿐이었다. 플래시를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완전한 암흑 속을 누벼본 적이 있었던가.
플래시를 끄고 정면을 찍은 사진
고요한 세상 속 어두운 산에서는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린다. 새소리인지 짐승 소리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기이한 소리들이다. 사오십 마리 정도 되는 개체가 일제히 꾸륵꾸륵 소리를 내기도 하고, 바스락거리거나 무언가가 투둑 떨어지기도 하고, 쇠로 된 울타리를 무언가가 텅 지기도 한다. 다른 감각을 차단당한 상황에서 청각적인 신호만 잔뜩 들어오니 상상력이 일어 더욱 섬뜩하다.
헬기 몇 대가 강을 따라 자꾸만 오갔다. 그러더니 내 옆에 멈춰서 한참을 머물렀다. 나를 구조하러 온 것인지 잠깐 고민해 봤다. 하긴 이 야밤에 혼자 산길을 걷고 있는 게 수상하긴 하지. 누가 간첩신고라도 한 건 아닐지.
자전거길에는 가로등이 없어 쉬지 못하고 한참을 서둘러 걸었다. 얼른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상상력의 밸브를 잠그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너무 힘들어서 발이 탄산수에 담가진 것마냥 따끔따끔 아팠다. 더 걸으니 앞쪽 발목이 끊어질 듯 아팠는데, 하도 통증이 심해서 다른 부위의 고통은 잊힐 정도였다. 이렇게 걸어서 내일 또 부상으로 못 걸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부디 하룻밤 휴식으로 치유되는 고통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지도 어플과 핸드폰 플래시, 보조배터리가 있어 최악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다. 10년 전 국토종주를 할 때는 스마트폰 초기, 아마도 갤럭시 노트3 정도 되는 모델을 사용했는데,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서 GPS를 켜놓고 걸을 수가 없었다. 정말 필요할 때만 잠깐 켜서 봐도 저녁에는 간당간당해지는 연약한 배터리 용량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GPS를 하루종일 켜놓고 걸을 수 있고, 보조배터리도 짱짱한 것으로 갖추고 있다. 이 밤길을 지도와 빛 없이 걸으려면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는가. 과거 보러 서울 가는 선비보다야 내 팔자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만난 가로등. 휴식하지 않고는 도저히 더 갈 수 없을 것 같아 배낭을 던지듯 내려놓고 앉아 쉬었다. 속도를 내서 걸어서인지, 어둠 속을 걷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패딩 안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지도를 보니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저 힘을 내서 걸어보기로 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가면 언젠가는 끝이 온다. 드디어 충주 마지막 표지판을 마주쳤다.
이내 원주시 표지판도 만났다. 이로써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찍게 되었고 내일부터는 경기도를 걷게 되니 전라도만 빼면 모든 도를 다 들러보게 되는 셈이다. 다리 건너 멀찍이 오늘의 숙소가 보였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스퍼트 한 번 내보자!
10년 전 40km 남짓을 걸어 낙단보에 도착했던 그 순간, 그때 느꼈던 만큼의 성취감이 느껴졌다. 아 씨바아아아아알, 내가 해냈다! 마음 같아서는 다리를 뛰어서 건너고 싶었지만 이미 발이 만신창이였기에 그냥 절뚝이며 건넜다.
하아아 이름만 봐도 달콤한 나의 숙소. 바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밥을 못 먹었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천릿길처럼 느껴지는 왕복 5분 거리의 편의점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숙소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생각이 전혀 안 들 것 같았다.
하... 편의점이 세상을 구한다. 당연히 닫았으리라고 생각한 이 작은 마을의 편의점은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인공조명을 새하얗게 켠 채로 활짝 열려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도시락이며 뭐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육개장 컵라면 하나가 너무 먹고 싶었다. 끓여서 한 젓갈 후루룩 집어먹으니 정말이지 유토피아가 따로 없고 암브로시아가 따로 없더라. 이 시간부로 육개장 컵라면을 내 쏘울푸드로 지정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반쯤 먹었는데 아저씨 세 분이 들어오더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있는 공간이 넓지 않아 옹기종기 끼어 앉아야 했다. 한 분이 다른 분에게 손짓하더니 '여기 앉아. 그 뒤에 학생 있어.'라고 하셨다. 학생이라기엔 양심이 없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습니다만 그렇게 봐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라면을 다 먹은 다음 간식주머니도 마저 채우고 길을 나섰다. 고양이가 배웅해 주었다.
마침내 도착한 강원도 원주의 모텔, 부론장. 하... 정말... 국토종주를 하며 묵었던 수많은 숙소들 중 이곳이 단연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난방을 안 켜두어서 내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달구기 시작해야 했던 수많은 모텔들과는 달리 이곳의 온돌은 이미 따끈하게 덥혀져 있는 상태였다.
화장실에도 보일러가 도는지 바닥이 따끈따끈해서 덜덜 떨며 씻을 필요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침대, 자부심 있는 것이 틀림없는 에이스 침대가 정말이지 예술이었다. 괜히 침대는 과학이라고 하는 게 아니구나. 천국 구름에 누우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폭신한 매트리스에 깨끗하게 잘 빨아둔 것 같은 보송하고 도톰한 이불까지, 그럴 리는 없지만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긴 하루였다. 해낼까 싶었지만 나는 해냈다. 남은 여정도 그렇게 해내버리고 말 것이다. 내일은 경기도로 간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