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켜니 드라마 <밤에 피는 꽃> 재방송이 나왔다. 지도 앱을 켜놓고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았다. 아침이라 더더욱 그랬다. 근처 막국수집에서 겨울 한정 메뉴로 떡만둣국을 판다고 되어 있는데 열었는지 알 길이 없어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정말이지 최고로 아늑했던 부론장 안녕.
유리문에 영업시간이 붙어 있었다. 11시부터였다. 10시가 조금 지난 시점이라 기다리자니 길었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문 앞을 알짱거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셔서 "떡만둣국만 되는데~" 하신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를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뜨끈한 떡만둣국이 끓여지기를 기다려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봤다. 자연인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 없는 사람 못 봤다. 홀몸이라면 모를까 부모고 가장이면서 왜들 그렇게 산속으로 회피하는 걸까. 어른이라면 뭐든지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뜨끈뜨끈한 떡만둣국에 남은 피로마저 가시는 듯했다. 국물과 만두 모두 슴슴했다. 양이 많아서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후식으로 믹스커피까지 한 잔 마셔주었다.
계산을 하는데 걸어왔냐고 물어보신다. 그렇다고, 인천까지 간다고 말씀드렸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 식당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길래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했다. 간절히 바라던 만둣국을 내주셨는데 잊을 리가요.
주방에 계시던 분이 나와서 말씀하신다. "무전여행 중인가 보네~ 젊음이 좋아~" 무전이라기엔 저 방금 이 만둣국도 계산했는데요. 하지만 나도 한때 무전여행이 곧 도보여행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아무튼간에 나는 아직 젊은이인가 보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게 젊음 아니려나.
험난한 길과 평탄한 길, 두 개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면 당신의 선택은? 나는 곧 죽어도 전자다. 평탄한 길은 막상 걸어도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험난한 길은 걸으면서 무엇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실제로 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불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 취향은 언제나 나를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이끌어준다.
어쨌거나 이 길은 정말 험난하긴 했다. 마법에 걸린 나무들의 공격을 칼로 막아내며 진격하는 동화 속 왕자가 된 줄 알았음.
오르막길이 너무 가팔라서 헉헉대며 걸어 올라갔다. 자전거 사망 사고가 여러 건 있었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적혀 있었다. 커브도 있고 경사도 심해서 내려서 끌고 가지 않으면 위험해 보인다. 걸어 다니면 다칠 가능성이 적긴 하다. 아무래도 속도가 빠르지 않으니까...
회사에서 잠깐 통화 가능하냐고 연락이 와서 짧은 보이스톡을 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하는 파트장님 말씀에 깜짝 놀랐다. 벌써 목요일이라니, 시간이 쏜살같이 간다.
드디어 드디어 경기도 진입!!!!!!!!!!!!!! 너무 기뻐서 만세를 부르며 뛰어들어갔다. 이제 진짜 다 왔다. 고생 많았고 조금만 더 힘내자!!!
바로 앞에 정자가 있어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깐 쉬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힘겨웠다. 쉬겠다고 찾아 앉은 정자마저도 천장이 뚫려서 비가 들이쳤다. 일기예보를 보니 3시쯤엔 그친다고 해서 믿어보기로 했다.
어제 무리한 것 치고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 내가 강해진 덕분인가 아침에 마신 커피의 위력인가. 왼쪽 엄지발가락 아래에 물집이 잡히려고 하길래 양말을 벗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발목보호대 때문에 양말을 헐렁하게 신은 탓이 아닐까 싶었다.
강우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처마 아래에 그냥 덩그러니 서 있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서 눈 뜨기도 어렵고 심지어는 고개도 못 들겠다. 숙이고 걸으면 저녁에 분명 어딘가 통증이 생길 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깨가 쑤시기 시작했다. 신발과 양말은 푹 젖은 지 오래였고 패딩도 다 젖어서 짜니 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구에서처럼 핸드폰이 침수되어 충전을 못 하게 되면 낭패니 충전구에 이어폰을 꽂아놓고 걸었다. 정신없고 힘들었다.
드디어 강천보!
강천보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우비가 온전히 지켜줄 수 있었던 부분은 두 팔 뿐... 나머지는 푹 젖었다. 종주 끝나고 돌아가면 꼭 패딩 드라이를 맡기겠다고 생각하며...
전망대에 앉아서 몸을 말리며 쉬었다. 몇 시간 만에 마를 정도가 아니었지만서도,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빗줄기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여유를 두고 오랜 시간 쉬다가 출발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비가 그쳤다. 비 하나 안 올뿐인데 훨씬 걷기가 수월하다. 이제는 다리가 아프지도 않고 그냥 생각 없이 걷게 된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여주에 왔으니 쌀밥을 먹어야겠다 싶어 처음에는 쌀밥집을 선택했는데 후기를 찾아보니 평이 그리 좋지 않아 루트에 있는 솥밥집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이게 며칠 만에 보는 경기도 버스냐. 평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보는 이 버스 디자인이 어쩜 그렇게 반갑던지. 경기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동네 모습도 점점 내가 사는 곳과 비슷해져 간다.
지나가다 내 이름이 있으면 꼭 한 번씩 찍어두게 된다
식당에 도착해서 들어가려다가 하늘에 철새 백여 마리가 오묘한 모양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여간 장관이 아니었던지라 지나가던 아저씨도 멈춰 서서 한참을 구경했다.
큰맘 먹고 3만 원이 넘는 게장정식을 주문했다. 하... 정말 국토종주 중 먹은 음식들 중 단연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맛있고 든든했다. 과연 왕에게 진상된 지역 특산물답게 밥알 하나하나 고슬고슬 뜨끈뜨끈해서 반찬 없이도 한 공기를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 간장 양념을 해서 바싹 익힌 제육볶음, 되직하니 건더기도 가득 들어간 우렁된장,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고린내 없이 감칠맛만 가득한 청국장, 거기에 밑반찬으로 나온 잡채와 궁채볶음, 시금치나물, 김치, 멸치볶음, 무절임, 쌈채소까지 빼놓을 게 하나 없는 맛 좋은 식사였다. 며칠 굶은 사람마냥 눈을 빛내며 먹었다. 정말이지 피로가 가시는 맛이었다.
10년 전에는 여주 시내에서 국토종주 첫 외박을 했는데, 이날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더 걸어보기로 했다. 식당을 나서니 으슬으슬 추위가 시작되었다. 날씨가 쌀쌀한 데다 무릎보호대와 양말, 신발이 다 젖어서 더 추웠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에 여장을 풀었겠지만 왜인지 힘이 넘치는 날이라 '열심히 걸으면 땀이 나서 몸이 덥혀질 거야!' 하고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여주보에 도착하기까지 1km 남짓 남았을까,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아서 무시하고 걸었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눈을 뜨기 어려운 정도까지 되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세상이 날 억까한다.
여주보 인증센터 부스에 들어가 잠깐 비를 피했다. 문이 없어서 비가 다 들이쳤지만 그나마 눈이라도 뜰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갈 길이 먼데 이렇게 비가 와서 어쩌나. 다시 시내로 돌아가서 자고 내일 일찍 출발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비가 좀 잦아드는 것 같아 의지를 다지고 부스를 나왔다. 나름 귀엽다고 생각했던 여주보 사진도 한번 재현해 주고.
다리를 건너 오늘 걸어야 할 길을 마저 걷는다.
마을을 따라 걷는 줄 알았더니 또 산길 당첨이다. 플래시를 안 켜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길을 이틀 연속 걷게 되었다. 플래시를 켜서 사진을 찍었더니 빗줄기가 찍혔다.
길은 어둡고 갈 길은 멀고 몸은 슬슬 차가워지고, 고통을 잊을 강력한 진통제가 필요해서 종주 중에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들으면서 가기로 했다. '밀림의 왕'이라는 팟캐스트인데 잘하고 싶어서 오히려 시작을 못 하고 항상 미루는 밀림의 왕들이 출연한다. 들으면서 너무 공감이 되고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큰 위안이 되었다.
이 팟캐스트를 들으며 세상에는 나 말고도 미루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달았다. 나처럼 가만 못 있고 자꾸 일 벌이면서 재미나게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미루고 밀리면서도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성취를 이뤄낸다는 것도 공통점.
이날 들은 에피소드에서 미루는 인간으로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밀림비용', 그러니까 지각해서 미안한 마음에 사가는 케이크 같은 것들 때문에 들어가는 비용을 언급했는데 이마저도 너무 내 얘기라서 마음속으로 공감의 벽 두들김을 수천 번 했다. 종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대학원 지원서 써야 하는데... 일 년째 미루고 있는데 과연 돌아가면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런던에서 석사 공부를 하고 있다. 여느 밀림의 왕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미뤘지만 결국에는 해냈고 좋은 결과를 얻어냈다!)
작은 마을을 가로질러가게 되었다. 문경까지는 아무도 없는 마을이 섬뜩하니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냥 생각 없이 걷게 된다. 그나마 가로등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감지덕지한 마음으로다가. 이 정도 마을이면 축복이다 축복.
강 건너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으리으리한 기와집 단지가 있길래 궁금해서 지도를 열어봤는데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뭐지? 국가기관인가? 아니면 종교단체? 후포리 관광명소 문서도 뒤져봤지만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여전히 미스터리다.
마을을 지나치니 또다시 끝없는 암흑 시작. 왼쪽이 플래시 끄고, 오른쪽이 플래시 켜고 찍은 사진이다. 거참 으스스하구만. 쉼터가 있길래 잠깐 앉아 쉬는데 마케팅팀 그룹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오랜 기간 염원해 왔던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확정이 아니기에 괜히 들뜨지 말자고 스스로를 진정시켰지만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한편으로는 종주가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도망쳐 온 현실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면서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기도 했다.
구름이 아니었다면 달 덕분에 밤길이 좀 더 밝았을 텐데.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내도 아니고 그냥 도로 양옆으로 모텔 네 개가 있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a) ♨ 표시와 함께 궁서체 간판을 건 '궁전파크모텔'
b) '브' 불이 나가서 '러 텔'로 읽히는 '러브텔'
c) 다른 국토종주자가 대단히 낙후된 내부 사진을 올리며 네이버 지도에 유일한 후기를 남겨준 '럭키모텔'
d) 그나마 멀쩡하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래서 괴리감이 느껴지는, 포털사이트와 지도 어플, 숙박 어플 그 어디에도 검색되지 않는 '파크장여관'
네, 제 선택은 c였습니다. 레퍼런스 사회니까요. 특히나 다른 국토종주자의 후기는 일단 믿어보게 된다. 다른 숙소들은 네이버 지도 후기가 아예 없어서 확인 자체가 불가능했다.
20년쯤 전에 가족여행을 하며 묵은 허름한 모텔의 로비 모습이 그대로. 키를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쉰다!
나는 청결도에 매우 둔감한 편이다. 시트 세탁을 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데다 샤워 따위 불가능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도, 모두가 가기를 꺼려한다는 인도 여행에서도 나는 벌러덩 눕고 음식 사 먹으며 재미있게 지내다 왔다. 국토종주를 하면서도 각종 예상치 못한 낡은 모텔들을 많이 들러 왔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푹 쉬고 나가곤 했다.
그랬던 나인데 이 모텔방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담배냄새의 정도는 정말로 예상을 웃돌았다. 정말 할머니댁 놀러 왔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면 도무지 머리 대고 잘 수 없을 그런 곳이었다. 어쨌거나 따뜻한 데서 샤워하고 잘 수 있으면 그게 행운이지. 보조배터리와 핸드폰에 충전기를 물려 두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