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주 13일 차, 충주 구간
상주 게스트하우스에서 추천받은 수안보 목욕탕, 낙천탕에 왔다. 어제 온천물에 씻긴 했지만 그래도 대중탕이랑은 느낌이 다르니까. 10년 전 매일 찜질방에서 자며 탕에 몸을 담갔던 기억이 그립기도 했다.
입욕권을 사는데 카운터에서 "... 여자죠?" 하고 물어보셨다. 머리가 짧다 보니, 특히나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은 많이 헷갈리시는 듯. 여탕 안에서도 분명 오해하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입장하자마자 후다닥 상의부터 벗어던졌다.
설 연휴가 끝난 평일 아침이라 한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씻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샤워를 대충 한 다음 탕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핸드폰도 없고 하니 가만히 앉아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했다.
목욕탕 손님들을 나이순으로 줄 세운다면 내가 막내 중의 막내가 될 것 같았다. 엄마 할머니 뻘의 손님들도 신기한지 나를 흘깃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 나이대의 여성들을 평소에 만날 일이 잘 없다. 내 일상과 이분들의 일상은 다른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었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세상이 아닌 곳에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욕탕이 곧 때 제거 작업장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때를 밀거나, 때를 밀기 위해 몸을 불리고 있었다. 머리를 빠글빠글하게 만 아주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플라스틱 의자에 쪼그려 앉은 할머니도, 모두모두 때를 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아 맞다, 때 밀기라는 액티비티가 있었지!' 생각할 정도로 때를 민 지가 오래되었다. 어렸을 때는 명절 전에 꼭 엄마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었는데. 내가 무슨 지우개라도 되는 양 박박 밀어대는 것이 너무 아프고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경험이다. 우리 집은 목욕 끝나고 뭘 사마시는 문화도 아니었기 때문에, 목욕탕은 그냥 지옥이었다.
그랬던 내가 자발적으로 목욕탕에 오다니. 그래도 싫기만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여전히 때를 밀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저 멀리 세신 가격표에 적힌 7만 원짜리 마사지를 받을까 했는데, 긴긴 대기줄을 기다릴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아 그만두었다.
언제 이렇게 되었을지 예상조차 안 갈 정도로 무참히 부서진 화장실 문을 건너 어딘가 이가 빠진 안내문을 마주하고 볼일을 봤다. 이렇게 우당탕탕 굴러가는 게 온천관광지 목욕탕의 매력 아니려나. 수건으로 몸을 닦고 락커에서 배낭을 꺼냈다. 걷는 내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배낭의 실제 무게를 수치로 알아내고 싶었다.
배낭의 무게는 4.89kg. 13일 만에 처음 알게 된 내 배낭의 무게. 약 5kg의 짐을 지고 부산에서 충주까지 걸어왔다. 5kg가 없었다면 더 빨리 걸을 수 있었을까?
가방을 내려놓고 내 몸무게도 재 봤다. 49kg였다. 평소에는 52-53kg 정도가 나가니 국토종주를 하면서 대략 3-4kg가 빠진 셈이었다. 고생한 티를 내고 싶었기에 생각보다 드라마틱하지 않아 실망했지만 원래 과체중이 아니었으니 건강에 이상이 있지 않은 이상은 이게 한계라는 생각도 들었다. 10년 전 국토종주를 할 때, 완주 후 부산에서 잠깐 놀며 스키니진을 하나 샀는데 두 달도 못 입고 작아져서 친구에게 줘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아가면 한동안은 옷 사지 말아야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차갑던 공기가 더 이상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해가 떠서일까 몸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져서일까. 10년 전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수안보온천호텔 앞을 지나갔다. 이번에도 여기서 자고 싶었지만 긴긴 코로나 격리 기간 동안 찜질방이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쳤다.
아침은 뭘 먹을까 하다가 이곳저곳에서 많이 보이는 올갱이해장국으로 결정했다. 엄청 땡기진 않았지만 지역 음식인 것 같으니 시도해 보기로. 그냥 평범한 시래기해장국에 다슬기 넣은 듯한 맛이었다. 원래 이런 것인지 작은 모래알 같은 것이 많이 씹혀서 뭔가 찝찝했다. 샐러드라 생각하고 열심히 섬유질을 섭취했다.
버스정거장 이름이 '시내'인 것과 영어 이름인 Downtown 스티커를 잘못 붙인 것 모두가 킬링포인트. '시내'라는 말을 지방에서만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추측하건대 시내라고 부를 만한 번화가가 두 군데 이상 존재하는 지역은 시내 대신 번화가 이름을 쓰는 것 같다. 서울이 홍대와 강남, 부산이 서면과 전포를 쓰듯이 말이다.
풀네임은 아마도 '충주호 토종 붕어탕'이겠지. 글자를 가성비 있게도 배치했다. 고령에서 먹었던 맛있는 어죽 생각이 났다. 어탕 한 그릇이 간절했지만 배가 꺼지기 전이라 쿨하게 넘기기로 했다.
걷다가 마을 정자를 발견해서 냅다 드러누웠다. 잠이 와서 걷기가 힘들기는 또 처음이었다. 몸이 축축 처지는 날이었다. 걷기 힘든 날이면 고통을 잊기 위해 하나씩 뜯어먹던 과자와 젤리도 잇몸이 부어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도무지 걷고 싶지 않았지만 가야만 했다. 남은 거리를 줄이는 방법은 걷기를 멈추지 않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나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강변길을 벗어나니 목가적인 논밭 풍경이 하루종일 이어진다. 이따금 과수원에서 전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한적한 길을 걷는 건 여전하지만, 사람들을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마을회관 문에 붙어 있던 원통 후보자 등록공고. 나이차 26년을 뛰어넘는 경쟁이라니 흥미진진. 과연 어떤 후보자가 당선되었을지 궁금하다.
10년 전 들러서 뚝배기불고기로 점심 식사를 하고 '너무 돈을 많이 썼나' 고민했던 그곳, 문강온천. 입구에서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어 제목을 떠올리기 위해 잠깐 서 있었다. 정답은 흥겨운 국민가요 <아모르 파티>.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지만 이제는 매점만 운영하고 있는 듯했다. 주인과 손님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왕 들어간 기념으로 뭐라도 사 먹고 싶었던 나. 고민하다가 코코팜을 하나 사서 나왔다. 화장실 찾기가 어려운 국토종주길의 특성 및 뭐만 마셨다 하면 바로 화장실 생각이 나는 내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음료수란 것을 사 먹어 본 역사가 없는데, 그냥 코코팜이 먹고 싶어서 샀다. 들고 다니면 무거울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후루룩 마시고 캔을 버렸다. 주인아저씨의 '여행 중인가 보네? 천천히 조심히 가세요~' 하는 따뜻한 말씀에 용기가 났다.
그렇게 약 1km를 걸었을까, 황량한 배경이 마음에 들어 사진을 찍으려고 삼각대를 찾는데 어라, 삼각대가 없다. 주머니에도 없고 가방에도 없다. 믿을 수 없어서 한참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에는 잃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코코팜을 사기 위해 배낭 앞주머니를 뒤지려고 삼각대를 내려놓았다가 그대로 두고 온 모양이었다.
1km를 돌아갔다 오면 왕복 2km. 소중한 2km어치의 체력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면 4분이면 갈 거리라는 생각이 들어 억울했다. 이럴 때는 치팅이라도 해서 물건을 찾아오고 싶은데 내 자전거는 물론이요 카카오바이크도 없는 상황이니 묵묵히 걷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온 길을 그대로 돌아 걸었다. 반대로 걸으면서 내가 이때까지 순풍을 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맞바람이 어찌나 드세게 치던지 얼굴이 다 시렸다. 맞바람 맞으며 다닐 때는 그렇게 억울하더니 순풍 타고 걷는 동안은 알아채지조차 못하는구나.
문강온천에 도착해서 다시 얼굴을 들이미니 주인아저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신다. 삼각대를 두고 간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두고 간 것 없는데? 잘 찾아봐요.' 하신다. 불안이 턱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삼각대를 두고 왔다고 생각한 아이스크림 냉동고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온천을 나온 나는 빈 버스정류장에 털푸덕 앉아 고민을 시작했다. 삼각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아, 아까 누워서 쉬었던 정자. 삼각대는 아무래도 거기에 있을 성싶었다. 말인즉슨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어야 삼각대를 찾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전진만 해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자리걸음으로 두 시간을 써야 한다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삼각대를 그냥 버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앞으로는 내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10년 전 사진들을 보며 더 많이 찍어둘걸, 이제라도 많이 찍자 생각하곤 했는데, 앞으로 이어질 여정에서 사진을 남길 수 없다니 큰 손해처럼 느껴졌다. 오프라인으로 살만한 가게를 마주칠 가능성도 요원했다.
그렇게 나는 국토종주 13일 만에 택시를 타게 된다. 처음에는 버스를 기다렸는데, 40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마냥 바라볼 수 없어서 택시를 불렀다. 경상도 어드메였다면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택시가 다행히 한 대 잡혔다. 2주 만에 차를 타니 생경하게 느껴졌다.
구미 구간을 점프했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에서 택시를 타면 치팅이 될지를 고민했다. 남지에서 휴식한 후 새로 세운 내 목표는 '부산부터 서울까지 이어지는 길을 오로지 내 발자국으로만 채운다'였다. 걸었던 길을 택시로 한번 더 오간 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미 내 발자국으로 채웠던 구간이니 말이다. 택시를 탄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와 걷기를 재개하면 될 일이었다.
주소조차 알 수 없는 그 정자에 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금방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정자까지 달려갔다.
삼각대는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아까 내가 탑승한 그곳으로 가주십사 말씀을 드렸다. 정확한 지점을 말하기가 애매해서 탑승한 지점보다 훨씬 앞에 내리게 됐다. 조금 더 걸어야 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나는 여정을 이어갔다.
나뭇가지 너머로 반짝이는 윤슬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겨울에 종주를 하며 마주치는 풍경들은 대체로 단조롭다. 한 개의 물감으로 그리는 단색화 같다고나 할까. 다 같은 색이어도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의 명도와 채도, 선의 굵기, 패턴의 밀도, 투명도와 질감이 모두 각기 달라 독특한 장면이 완성된다. 겨울 풍경이 쓰는 색은 마치 이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며 빛을 바래온 것 같아서, 여름이 왔을 때 이 엉겨 붙은 죽음들을 떨쳐내고 칠해질 색은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하게 한다.
이렇게 텅 빈 공간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던 도시가 얼마나 밀도 높은 공간이었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매일 지내는 곳이라서 몰랐는데, 도시는 마치 낙서가 가득한 분식집 벽처럼 소리와 존재가 가득 들어찬 시끄러운 곳이었구나.
밥때가 되었는데 마땅한 식당이 없어 유일하게 문을 연 콩요릿집에 들어왔다. 비지찌개를 주문하니 띄운 비지인데 괜찮겠냐고 물으시는 사장님. 차이가 뭐냐고 하니 청국장처럼 냄새가 좀 날 수 있다고 한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이내 받아 든 비지찌개를 싹싹 비웠다. 생각보다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국장보다도 덜한 것 같달까.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종종 가던 두부집의 향수를 일으키는 맛이었다. 그때는 두부 같은 걸 왜 찾아먹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다.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 위에서 연식이 20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깔깔유머집을 발견했다. 노골적인 성인 유머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빛바랜 표지. 촌극이 따로 없었다.
10년 전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발견해서 재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고도 어디였는지,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서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이때까지 찍은 사진들 중 배경이 가장 고스란히 보존된 컷이 아닌가 한다.
남한강을 걷는 내내 절경에 감탄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보며 올라왔지만 남한강과 북한강의 장면 장면들은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근사했다. 겨울인데도 차박 캠핑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잡초 새순인지 노랗게 죽어가는 풀인지, 아무튼 노오란 색이 겨울에 보기 어려운 것이라 찍어보았다.
셀프 수리의 흔적이 역력한 트럭. 그렇죠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됐죠. 외관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10년 전 지나가면서 너무너무 무섭고 으스스하다고 적었던 귀골산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며 그때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생각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으니 도시를 막 벗어난 참이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측량하는 사람들과 큰 개. 일하는 것 같은데 개는 왜 데리고 온 걸까. 동료인가.
10년 전 전사진 찍었던 곳을 또 발견했다. 당시에는 사람이 없어서 이때다 하고 찍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뒤쪽에 측량기사들이 있었다. 신경 안 쓰고 그냥 찍었다. 각자가 할 일을 하는 아름답고 건전한 사회.
오늘 35km는 걷겠다고 다짐했는데 발바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몸도 축축 처져서 힘들다. 앞으로 한참 동안은 버스가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정류장에 앉아 다리를 쉬어 주었다. 그래도 충주시청까지는 가봐야지. 그래야 잘 곳이 있지. 스스로를 달래며 무거운 배낭을 다시 들쳐업었다.
탄금대를 떠나왔던 10년 전의 나, 탄금대를 향해 가는 현재의 나.
갓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속도 줄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어디 가냐고 태워주냐고 물으셔서 도보여행 중이라고, 걷는 여행이라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고생이 많다면서 뭐 줄 거 없나 하고 차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신다. 정말 괜찮다고 극구 손사래를 쳤지만 운전자 아저씨는 기어코 손에 물티슈를 쥐어주시고 쿨하게 떠나셨다.
정말이지 추상화가 따로 없는 절벽의 패턴. 충주시에 진입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표지판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 기념으로 한 장 찍어주었다.
드디어 충주 시내에 진입했다. 10년 전 충주에 도착했을 당시 나는 찜질방 숙박을 거절당했다. 미성년자라는 게 그 이유였다. 법적으로 나는 성인이고 숙박이 가능한 나이라고 검색 결과를 들이밀었지만 주인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힘든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쉬려는 참에 거절을 당하니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그때 한복집 이모를 만났다. 찜질방 단골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무슨 일이냐며 물으시고는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카운터를 설득해 주었다. 목욕탕에서 내 여행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깜짝 놀라며 등산양말도 사 주시고 물집 짜는 법도 알려주신 따뜻한 은인. 이후로도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연락을 해서 챙겨주셨다.
충주에 오니 그분 생각이 나서 연락처를 뒤져보았지만 하도 오래전이라 찾기가 어려웠다. 도움을 받았는데 국토종주를 마치고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표현하고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복이모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시길 바라게 됐다.
충주 시내는 규모가 제법 커서 선택할 수 있는 모텔 옵션이 꽤나 많았다. 고민하다가 개중에 가장 저렴한 모텔을 골랐다. 편의점에 들러 간식 봉지를 채우고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렴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조명이 너무 어두워서 답답했고, 방이 추웠으며, 화장실이 수련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것을. 10년 전이었다면 힘든 하루를 보내고 온 내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비관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꽈배기를 잔뜩 배달시켜서 먹고 덜덜 떨며 씻은 다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