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과 2024년, 두 번의 도보 국토종주를 했다. 한겨울에, 여자 혼자, 인천에서 부산까지를 왕복하며 약 1200km 되는 길을 걸었다.
2014년과 2024년. 변한 건 카메라 화질뿐이 아니다
걷는 동안, 그리고 걸은 후에 가장 자주 마주하는 반응은 이런 것이다.
"히익 아가씨가 혼자서~ 대단하다잉~"
여자가, 겨울에, 혼자서, 이 세 가지 조건은 국토종주를 하는 데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의외로 국토종주를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 중 위 세 가지에서 비롯된 비율이 높지 않다는 사실. 겨울 종주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올린 바 있으니, 이번에는 여자 혼자 걸어서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또 국토종주를 하기 좋은 조건이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 좋은 점은 내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될 일이 잘 없다는 것이다. 사노라면 덩치 작은 여자라는 사실이 불리할 때가 많지만 인간의 호의 없이는 완주하기 힘든 국토종주길에서는 자주 도움이 된다.
예를 들자면 노숙을 하게 된 날, 마을 주민인 할머니에게 발견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스스로가 무해한 여행자임을 어필하고자 한다면 남자일 때가 유리할까, 여자일 때가 유리할까? 주민으로서 호의를 베풀 때 고려해야 할 위험이 남자일 때 많을까, 여자일 때 많을까? 여정 중에 만난 은인들은 내가 남자였어도 도와주셨을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 존재가 작은 위협이라도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기에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종주를 했다. 파는 빵을 그냥 싸주신 카페 사장님도 계셨고, 꼼짝없이 노숙행인 나에게 전기장판 켜진 침대를 내주신 분도 계셨다.
반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위협을 당하기 쉬운 존재라는 말도 된다. 혼자 걷다가 납치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여자들의 뉴스를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보고 들어 왔다.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 돌아왔지만 만약 내가 어떤 범죄의 타깃이 되었다면 사람들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범죄의 키워드 자체에 분기탱천하기보다는 그 외진 곳을 젊은 여자가 왜 혼자 걸어 들어갔는지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좋아하기로 소문난 나도 걷는 동안에는 경계심을 최대치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작은 불편들이 발생한다. 종주길에는 화장실이 많지 않지만 아무 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볼 수 없기에 최대한 참거나 물을 최소한으로 마셔야 한다. 아무한테나 재워달라고 할 수 없으니 어디든 마음 놓고 잘만한 장소를 매일 해 지기 전까지 찾아내야 한다. 마치 무궁화 꽃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나의 국토종주는 움직일 수 있는 동안 최대로 움직이며 이어가는 여정이었다.
물론 해가 진 뒤에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숙소를 찾았다고 한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자였다면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모텔에서 자면 몰카가 있을까 봐, 누가 방 문을 따고 들어올까 봐 걱정스럽고 찜질방에서 자면 성추행을 당할까 걱정해야 했다. 내가 조심해 봤자 방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조심하게 된다. 이미 일어난 적 있는 사건들이기에.
여행의 매력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경계심 max 모드에서는 이조차도 불가능하다. 실제로 10년 전에 사람을 믿었다가 후에 돌이켜보고 '와, 그때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하며 아찔해했던 경험을 하고 난 뒤로 길에서 만나는 남자들에게는 굳이 말을 걸지 않고, 먼저 말을 걸어온다면 절대로 웃지 않고, 어쩌다 대화를 하게 되면 잠시 후에 합류하는 일행이 있다던가 내 위치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 중인 가족이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내 안전을 확보했다. 호의를 베풀며 접근하는 사람에게서 위협이 느껴진다면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자, 은인이라고 부모님께 사진을 보내드리겠다/SNS에 올리겠다'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라면 공감할 테지만, 남자라면 이렇게까지 의심을 하는 내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아직 글을 쓰지 않았기에 스포일러가 될까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경계하고도 국토종주를 하는 동안 성희롱을 두 번 당했다. 머리도 짧고 예쁘지도 않고 옷도 두껍게 입은 내가 각종 조심에 조심을 다 했음에도 말이다. 더 큰 일 아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불쾌한 사건이었다. 이런 경험은 나를 이후에 일어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또 최대치로 경계하게 만든다.
안전상의 이유로 내심 '이번에는 머리가 짧으니까 나를 남자로 착각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가해자들은 귀신같이 성별 구분이 되는 모양이다.
무시무시한 얘기만 했는데, 이런 리스크들이 사실 국토종주를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성희롱 성추행 강간 살해 뉴스를 보면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에 있다가, 일하다가, 퇴근하다가, 번화가에 놀러 나갔다가 피해를 입는다. 기왕 아무것도 안 하고 평범하게 살아도 당할 수 있는 거, 그런 가능성에 가로막히지 말고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자는 게 내 삶의 방식이다.
사실상 종주를 하는 동안은 평소보다 낮은 인구밀도를 경험하게 되기에 인간에게 당할 수 있는 범죄의 가능성은 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야생동물한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야 높아지겠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살인자나 강간범이라면 사람이 열두 시간에 한 명, 그마저도 자전거를 탄 남자만이 주로 지나가는 어두컴컴한 겨울 산속에 쭈그려 앉아 타깃이 오기를 기다리느니 밝고 유동인구 많은 번화가에서 타깃을 물색할 것 같다. 그래서 해진 뒤 산길을 걸을 때는 인간보다 귀신이 더 무서웠다.
해가 진 뒤의 산 속은 정말 칠흑같은 어둠이다. 내가 범죄자라면 이런 데 숨어서 5년에 한번쯤 등장할 피해자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귀신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국토종주
혼자서 여행은 물론이요 혼자서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도 가고, 파인다이닝도 가고, 뷔페와 고깃집도 가고, 뮤직 페스티벌도 가고, 아무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 이상은 전부 혼자 해 본 프로 홀로하기러로서 국토종주를 혼자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사진은 어차피 삼각대가 다 찍어준다.
혼자 걸으면 내 상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내 체력이 떨어지면 쉬고, 내가 배고프면 먹는다. 만약 동행이 있었다면 더 걸을 수 있는데 쉬어야 하고 쉬고 싶은데 더 걸어야 하는 상황이 스트레스였을 것 같다. 먹고 싶은 지역 음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 말이다. 안 그래도 힘든 여정이기 때문에 걸리적거리는 요소는 하나라도 제거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체 외로움을 안 타는 성격이기 때문에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하루종일 한 마디도 못 해서 심심할 때면 아래 글에 정리한 대로 혼자서 놀았다. 홀로 종주할 때의 단점이 있다면 무거운 짐을 나눠들 사람이 없다는 것, 숙박비를 전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최소 2인부터 주문 가능할 때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 정도이려나?
국토종주는 의외로 강철 같은 신체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헬스 트레이너가 인정한 '인자약 (인간 자체가 약함)'인데도 완주를 했다. 필요한 것은 힘 그 자체보다는 끈기와 시간이다. 하루에 걸을 수 있는 양이 적으면 그만큼 총기간을 늘리면 된다. 하루에 10km씩만 걸어도 포기하지 않고 가면 언젠가는 완주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잘 데는 마뜩잖겠지만.
실제로 나는 스무 살에 걸은 하루치 분량이 서른 살에는 버거움을 깨달은 뒤에, 만약에 마흔 살에 또 종주를 한다면 기간을 아주 길-게 잡고 여유롭게 주변 구경도 하고 지역 음식도 실컷 맛보면서 가보자고 다짐했다.
덜 지쳤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기에
그렇다면 국토종주를 하기 어려운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 화장실이 깨끗해야 하는 사람. 화장실이 깨끗하지 않아서 캠핑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전술했듯이 국토종주길에는 화장실이 많지 않고, 그마저도 대참사인 경우가 종종 있다. 냄새가 끔찍하다던가 각종 벌레와 거미줄이 주렁주렁 널려 있다던가. 자주 이용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오랜 시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생리 기간이 겹칠 가능성이 높은데 위생용품 처리가 마땅치 않으니 불편할 수 있다.
너무 까기만 해서 덧붙이자면, 국토종주길 화장실 중에는 놀랍도록 청결하고 아늑하고 따뜻하고 우아하게 관리되는 곳도 꽤나 많다. 그런 화장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관리하는 지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기에 혹시라도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나 지금이나 깨끗한 화장실은 좋은 재정비 쉼터가 되어준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못 자는 사람. 한 달 가까이 낯선 곳에서 자야 하고, 숙박용으로 마련된 침대가 아닌 곳에서도 자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치명적인 단점이다. 매일 고강도의 신체노동을 해야 하는 국토종주 특성상 밤에 최대한 많은 회복을 이루어내야 하는데 잠을 못 자면 다음날, 다다음날이 훨씬 힘들어진다. 마실 커피를 구하려면 10km를 더 걸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침대에 누우려면 꼭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샤워고 나발이고 일단 얼어 죽지 않고 누울 데만 있어도 감지덕지한 날들이 이어진다. 물이 안 나와서 싸들고 온 생수를 아껴가며 양치질을 하고 물티슈로 세수를 한다. 안 그래도 무거운 가방에 잠옷 챙길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다. 며칠 안 씻어도 괜찮고 아무거나 입고 아무 데서나 자도 무탈한 무던함이 국토종주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잘 곳은 구했지만 씻을 데가 마땅치 않았던 날들
마지막으로 뜻밖에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 시골에는 큰 개를 정말 많이 키운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면서 내 냄새만 맡고도 동네가 떠나가라 컹컹 짖어댄다. 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개들이 다 짖기 시작한다. 밤길을 걸을 때는 괜히 주민들을 깨울까 봐 민망하기도 했다. 개 짖는 소리 자체를 무서워했다면 내내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 같다.
짖는 소리만 들린다면 다행인데 안 묶어놓고 기르는 큰 개들도 꽤나 자주 마주쳤다. 키우는 게 아니라 들개였을 수도 있다. 개 좋아하는 나도 물릴까 봐 쫄려서 식은땀이 났는데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면 주저앉고 싶지 않았을까... 걷다 보면 멧돼지나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을 만날 수도 있다. 누구든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짐승은 기세로 이겨야 함을 기억하고 최대한 안 쫀 척, 나는 너를 이길 수 있지만 굳이 너에게 피해를 줄 생각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유유히 지나가시기를.
고라니는 빛의 속도로 사라지기 때문에 딱히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국토종주, 할까말까
이래저래 불리한 조건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국토종주를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면 나는 일단 한번 출발해 보라고 등을 떠밀어주고 싶다. 시험 삼아 며칠 걸어 보다가 양평쯤 가서 숙박이 필요해지면서 얼레벌레 시작한 게 내 첫 국토종주였다. 일단 걸어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그만둬도 된다. 다치면 쉬다가 나중에 다시 시작해도 된다. 다 각자의 국토종주 스토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래서 못 하겠네'가 아니라 '이런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해냈다!'의 과정이 되기를,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런 극복의 여정을 걸어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