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되었다고 부르시는 사장님 목소리를 듣고 식당으로 나갔다. 날이 쌀쌀한지 코가 시렸다. 저쪽 테이블에서 자전거 종주 중이라는 스무 살 남자애 둘이 밥을 먹으며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다닌다는 걸 봐서 마이스터고 출신이거나 고졸취업을 한 것 같았다. 10년 전 입사를 앞두고 국토종주를 했던 내가 겹쳐 보여서 반가웠다. 말을 걸까 하다가 괜히 주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아침밥은 볶음밥과 떡미역국이었다. 미역이 들어간 떡국인지 떡이 들어간 미역국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사장님과 경로 이야기를 나눴다. 수안보 가면 목욕하라며 대중탕을 추천해 주셨다. 온천에서 잘지 목욕을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싹 풀릴 것은 확실했다. 10년 전에 종주할 항상 찜질방에서 잤기 때문에 목욕이 일상이었는데, 이번에는 샤워만 하고 잠드는 밤이 많다.
컹컹 짖는 개를 뒤로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칠곡을 날 때 났던 것과는 다른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유럽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향이었다.
도로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드물게 쌀쌀한 날이었다. 조금 걸으니 금방 어제 빠져나온 자전거길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강 가까이로 내려가 볼 수 있는 데크가 있어서 타이머를 맞춰놓고 사진을 찍었다. 강 그리고 그에 비해 작은 나.
낙동강길구간이 끝나 간다. 보내줄 때가 되니 더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 어젯밤에 무릎 통증이 심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만큼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낙동강 자전거길 다음으로 걸어야 하는 새재 자전거길이 시작되었다. 국토종주길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것 같은 긴긴 길, 걸으면서 별 고생을 다 했는데 그래서인지 유독 후련하게 느껴진다.
마시멜로가 쌓여있길래 호다닥 가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어렸을 적 쌓여 있는 마시멜로들을 보고 먹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최근에 기사를 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짚단을 둘둘 말아 겨우내 싸두면 발효가 되어서 소들의 별미 간식이 된다고.
사실 10년 전에도 마시멜로를 가까이서 보고 신기해서 주춤주춤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누가 볼까 봐 걱정이 되어서 눈치를 보다가 찍혔다. 이제는 누가 보든지 말든지 패션모델 포즈 가능.
오늘도 열일해 주고 계시는 삼각대 선생님. 고릴라 삼각대를 사 오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바닥에 설치해서 찍을 수 있는 환경이 잘 없다.
드디어 이곳, 낙동강길의 시작점에 도착했다.10년 전 남쪽으로 걸을 때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나!' 하는 비장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힘든 건 다 끝났다, 끝까지 잘 해내보자!' 하고 안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낙동강길이 힘들긴 힘들다. 길고 외졌고 숙소나 식당도 잘 없고. 앞으로는 계속 마을을 만날 예정이라 마음이 좀 놓인다.
좌우반전에 둔감한 인간 댓츠 미...
걷다 보면 10년 전 사진을 찍었던 구조물들이 사라지거나 이동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곳은 다행히 그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눈이 새하얗게 쌓였는데 이날은 마지막으로 눈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상태였다는 것.
잠깐 앉아 남은 거리를 따져 보았다. 오늘 35km는 걸어야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다. 네이버로 예약한지라 게스트하우스가 열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좀 불안했다. 점심즈음에 전화를 한번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출발할 때는 하루에 35km씩 걷자고 계획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음을 이제 와서 깨닫는다. 체력도 몸 상태도 10년 전과는 다른 거겠지. 어쨌거나 오늘은 35km를 걷지 못하면 17km 거리에 있는 점촌역에서 자야 하기에, 무리하더라도 한번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름 귀엽다고 생각했던 사진도 재현해 보았다. 꼭대기에 동그란 대가리가 떨어져 있길래 주워 올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세울 수가 없어 그냥 원래 있었던 곳에 놔두었다.
보통은 여자 화장실이 두 개인데... 국토종주길이 남초임을 보여주는 공중화장실.
지도에 태봉산이라고 되어 있어 보니 작은 동산이었다. 이렇게 자그마한 것도 산이라고 불러주는구나.
귀여운 포토존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삼각대로 사진을 찍으면 풍경을 다 담지 못하는 게 아쉽다. 주로 바닥에 내려놓고 찍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강에 비춘 산이라던지 하는 멋진 장면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귀여운 발바닥
바람 때문에 머리가 까치집이 되었다
화장실 급한 와중에 만나는 마을회관은 가뭄에 단비. 몸이 자꾸 처지고 힘들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더욱 체력 소모가 컸다. 가야 할 길은 먼데 왜 이렇게 힘이 안 나는지. 오후에 도착하는 점촌역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며 억지로 도파민을 짜냈다.
이곳이 처마끝이었음을 누구에게 알려줘야 했던 걸까
평화로워 보이는 돌조각들
드디어 상주 구간을 끝내고 문경으로 진입. 인스타에 데이트명소로 뜰 것 같은 오스테리아가 있길래 여기에서 꼭 뇨끼를 먹겠노라고, 3시가 브레이크 타임이니 먹는 시간 고려해서 2시까지는 꼭 도착하겠노라고 결심하고 미친 듯이 걸어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미 마감했다고 한다. 아직 두시인데요! 속상했지만 혼자 온 주제에 마감한 주방을 다시 열게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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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붕어빵을 사 먹었다. 팥, 슈크림, 고구마 세 가지 맛이 있어서 팥과 고구마를 하나씩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맛이 세 가지라는 아저씨.
"네, 그러니까 팥이랑 고구마 하나씩이요."
"아니, 세 가지가 다 들어 있다고!"
알고 보니 한 마리에 세 가지 맛이 다 들어 있는 센세이셔널한 멀티테이스트 붕어빵이었다. 무슨 맛일까 싶어 갸웃하며 두 마리를 샀다.
"더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야..."
뒤통수에 대고 저주 같은 예언을 하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나왔다. 붕어빵은 의외로 맛있었다. 팥과 슈크림과 고구마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냥 소를 다 짬뽕한 건가 싶었지만 아무튼 맛있는데 무엇이 문제랴. 아저씨 말대로 몇 개 더 살걸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식사 전이라 죄책감이 들었지만 며칠 전 인생 꽈배기를 맛본 이후로 꽈배기 홀릭이 된 나.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맛은 그냥저냥이었다.
오스테리아 뇨끼 먹기에 실패하고 뇨끼를 안 먹으면 한이 맺힐 것 같아서 근처 뇨끼 파는 곳을 찾아보았다. 이름만 들어본 양식 체인 메뉴판에서 뇨끼를 찾아냈다. 프랜차이즈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이외에는 옵션이 없었으므로 일단 찾아가 보았다.
식당은 생각 외로 패밀리 레스토랑 분위기였다. 이런 곳에서까지 혼밥을 하다니 이제는 정말로 혼밥 만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아무튼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가격에 비하면 고기도 괜찮고 양도 많았다. 이 정도면 Plan B로 충분했던 듯.
오랜만에 만난 번화가를 벗어나 다시 시골길로. 걸으면서 민박집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예약이 잘 되었다고, 와서 숙박하면 된다고 한다. 한시름 놓았다.
동상이 유독 많이 서 있었던 초등학교 앞을 지나갔다. 라떼는 말이야, 자정에 세종대왕 동상 책장이 넘어가고 동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신성해 보이는 높은 교각을 향해 걸었다. 몸이 힘들어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일도 30km 남짓을 걸을 수 있을까? 앞으로 매일 30km씩을 걸을 수 있을까? 발이나 다리 등 부위의 통증은 시작할 때에 비해 많이 줄었는데, 몸이 처지고 힘든 건 아무리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슬슬 해가 넘어가려고 하는 와중에 눈발까지 흩날리기 시작했다. 정말 환장하겠구만. 바짝 말라서 미이라가 된 은행 더미를 밟으며 계속 걸었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하지만 차가 없는 뚜벅이 신세라 포기했던 문경관광사격장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되다니. 늦어지더라도 사격 한번 하고 갈까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문 닫는 시간까지 딱 10분이 남아 있었다.
너무 아쉬웠다. 미리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좀 더 일찍 도착했을 텐데. 입맛만 다시며 마저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몸이 밀렸다. 안 그래도 힘든데 저항하면서 걸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자우림과 체리필터 노래의 아는 구간을 무한 반복했다.
새재길의 첫 번째 인증센터인 문경불정역에 도착했다. 드디어 낙동강길이 아닌 다른 페이지에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해가 아직 지지도 않았는데 폐역이 왜인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예전 사진 재현해서 한 방 찍어주시고. 여전히 방향이 헷갈리는 중.
역 안에 들어가기가 겁이 나서 망설이다가 언제 화장실이 나올지 모르니 용기를 내 보았다. 화장실은 생각보다 무난했다. 길게 쉬고 싶었지만 해 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할 것 같아 얼른 완전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도 어플이 국도를 걸으라고 안내해 주어서 당황스러웠다. 와중에 자전거길이 야무지게 분리되어 있어서 걷기 나쁘진 않았다. 차들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는 무서웠지만.
정말... 정말 이 길이 맞나요... 내비게이션이 이상한 길을 안내해 줘서 의심하면서 가다가 차를 세웠는데 바로 앞이 절벽이었고, 내비게이션이 '아깝다...' 했다는 괴담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여긴 길이 아닌데요, 그냥 산속인데요...
가야 하는 방향을 향해 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차도로 합류할 수 있었다. 조난되지 않아서 다행. 돌이켜보면 이날이 가장 이상한 길을 많이 걸은 날이었다.
걷다가 만난 휴게소. 뚜벅이로서 휴게소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지 않기에 일단은 들어가 보았다. 인테리어가 여느 휴게소와는 달리 좀 특이했다. 영화 <러브 익스포저>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배경이 되는 코뮌 같은 느낌이랄까... 나중에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는데 학교 선배가 '나도 이 휴게소 알아, 나도 특이하다고 생각했어' 하고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정말 확실히 뭔가 특이하더라니까요.
숙소 근처에는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보여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휴게소는 짜장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간고등어 정식을 주문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뜨신 밥을 먹어야.
해가 다 졌지만 길이 정말 잘 되어있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잘 닦인 길을 따라 벚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서 오히려 근사했다. 벚꽃 필 때 오면 정말이지 끝내줄 듯. 꽃망울 가득한 길을 상상하며 즐겁게 걸었다.
오... 갑자기 이런 길을 걸으라구요...? 불빛 하나 없는 농로를요...? 숲 속을 걷는 것보다 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이 더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해 진 숲 속에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만 논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작은 창고와 비닐하우스들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남지읍 안마사 아저씨가 알려주신 정보를 곱씹었다. 논밭에서 일하는 분들도 저녁에는 마을로 퇴근한다며.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겁이 없어지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길을 걸을 때는 오금이 저려서 카메라 설치는 엄두도 못 냈는데, 걷다 보니 생각이 없어져서 한 장 남겨보았다. 밤길 걷기 하는 사진 남길 일이 몇이나 있겠냐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마저 걸었다.
농로를 빠져나오니 깨끗한 마을이다. 멀지 않은 곳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나만 묵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손님이 둘이나 더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자전거로 그랜드슬램 도전 중인 J님, 차로 여행 다니기를 즐기신다는 C님, 이렇게 넷이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뜻밖에 사장님이 나와 동성동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흔한 성이 아닌데 신기했다. 돌림자를 고려해 봤을 때 숙부뻘이 아닐까 싶었다.
전날 묵은 민박에서는 여자 손님이 나뿐이라 혼자 잤는데, 이날은 C님과 같이 자게 되었다. C님이 말씀하시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공감되고 감탄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MBTI가 똑같으셨음. 또 다른 ENTJ 여자를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게 가장 큰 힘이야. 나래씨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는 게 옳은지 때때로 의심하곤 한다고 하니 내가 옳고 나는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살면 된다고 얘기해 주시던 C님. 나와 성격이 비슷한 인생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한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멋진 분을 알게 되어서, 스스로에게 확신을 얻게 되어서 참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