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서 방이 밝았다. 핸드폰을 눌러보니 꽤나 이른 시간이었다. 전날 늦게까지 대화를 했던지라 잠이 부족할 것 같아서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마셨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라면을 무제한 제공해 주는데, 종류도 제법 많다. 열라면과 처음 보는 짜장라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J씨가 마침 거실에 있길래 의견을 물었다.
"아침부터 열라면은... 좀 맵지 않을까요?"
아침부터 틈새라면 조지는 삶을 살아오긴 했지만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 짜장라면을 끓였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정말 맛이 없었다.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서 그냥 면만 후루룩후루룩 먹어야 했다. 짜파게티에 들어 있는 코딱지만 한 건더기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나를 따라오던 CCTV
방에서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오니 C님이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피넛버터앤젤리샌드위치를 만드시겠다며 빵 한쪽에 피넛버터를 듬뿍 바른다. 이제 다른 한쪽에 잼을 바르면 되는데... 아뿔싸, 잼이 안 열린다. 나도 뚜껑 열기에 동참해 보았지만 여전히 안 열린다. 결국 J씨가 열어주었다. 덕분에 젤리 없는 P&J 먹을 신세를 면했다. 애초에 모두가 열 수 있을 정도로 잠가놔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J씨는 먼저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 나도 신발끈을 맸다. C님이 멀리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셨다. 꼭 안아주며 가는 길 응원한다고 하신 말씀에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었다.
조금 걸으니 문경종합온천 표지판이 보인다. 10년 전 국토종주를 할 때 8일 차에 하룻밤 묵어갔던 곳이다. 근방에서는 유명한지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사람도 많아서 눈길을 뚫고 온 지친 몸을 뜨끈하게 잘 쉬어주었던 기억이다. 당시에 남겨둔 메모를 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온천처럼 크고 찜질복 색도 치히로가 입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되어 있다. 이번에도 들렀으면 좋았으련만, 아무래도 10년 전과 숙소까지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거대한 구조물들
이날은 아주 중요한 미션이 있었다. 어쩌면 내 국토종주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그런 미션이었다. 처음 국토종주를 하던 시절, 수안보에 도착한 나는 그곳의 특산요리가 꿩고기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음식 먹어보기를 좋아하는지라 간절히 먹어보고 싶었지만 당시 내 지갑사정에는 비싼 가격이었다. 언젠가 돈 벌어서 꼭 먹으러 와야지. 그리고 그 바람은 십 년째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랬기에, 꿩고기는 체력은 없지만 돈은 있는 서른 살의 국토종주에서 무조건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이었다. 다른 건 못 먹어도 꿩고기는 꼭 먹겠노라고 내내 다짐해 왔다.
돼지 캐릭터가 너무 깜찍해서...
막상 충청도에 가까워지니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꿩고기는 1인분을 파는 식당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약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으니. 나는 청주에 사는 친한 언니에게 꿩고기 먹으러 올 생각 없냐고 연락을 했다. 흔쾌히 오겠노라는 답이 왔다.
그날 숙박을 어디에서 할지 걸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국토종주 특성상 일정을 미리 확정할 수 없었다. 문경까지 와서야 '오늘 밤은 수안보에 도착할 수 있겠군' 하는 확신이 들어 D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입니다. 충주로 오세요.
철저히 하기 위해 식당에도 예약 전화를 걸었다. 8시 반에 예약하겠다고 하니 7시 반까지만 예약이 된다고 한다. 이때까지 걸어온 속도를 고려해 보면 7시 반 도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따위 제약으로 내 의지를 꺾을쏘냐. 나는 그때로 예약을 해달라고 하고 배낭을 고쳐맸다.
가보자. 7시 반까지. 내가 오늘 무조건 꿩고기 먹고 만다.
어딘가에서 호로로로로롱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소리가 방울소리 같네. 방울새인가?' 하고 검색해 보니 정말로 방울새였다. 뭐야 나 어떻게 알았지? 이 정도면 새 영재가 아닐까나. 후훗
무형문화재 전수관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새재길은 강보다는 산길이 더 많다.
10년 전 수안보에서 문경으로 걸었던 날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힘들었는데, 이날은 너무 더워서 힘들었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안에 입은 옷을 전부 벗어서 집어넣었다. 반팔티를 가져올 걸 그랬다고 후회할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전날 이화령 라이딩을 한 J씨가 눈이 왔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이렇게 기온이 달라질 수 있나.
수안보에 꿩고기가 유명하다면 문경은 한우가 유명하다. 평소였다면 휴게소에서 한우갈비탕이라도 한 사발 했겠지만 이날은 달랐다. 한우는 다른 데서도 먹을 수 있어! 하지만 꿩고기는 못 먹어! 점심은 쿨하게 스킵하고 걷기를 이어갔다.
'백설공주도 꺠운다는 문경 사과' 솔직히 좀 궁금하다.
국토종주 라이더들에게 악명 높은 3대 업힐 (오르막길)이 있다. 4일 차에 걸은 창녕의 다람재, 10일 차에 걸은 상주의 경천대 그리고 오늘 걷게 될 백두대간 이화령이다. 하필이면 스피드를 내야 하는 날에 어마어마한 업힐을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뭐, 나는 평지보다 산에서 빠른 사람이니 어쩌면 유리할지도 모르지. 본격적으로 오르막에 진입해 본다.
아침에 쌩쌩할 때 5km/h 정도로 걷고 이후로는 지쳐서 4km/h대로 떨어지는데, 가파른 이화령 언덕을 5.6km/h로 올랐다. 스스로도 놀랐다. 꿩고기에 대한 열망이 이 정도구나 내가. 진정한 먹보로다. 숨이 찼지만 오히려 평지를 빨리 걷는 것보다는 쉬웠다. 말도 안 되는 도전을 하니까 아드레날린이 싹 돌아서 힘든 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전날 눈이 왔다더니 정말로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었다. 종주 내내 눈 내리는 걸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네. 쌓인 눈과 서리만 잔뜩 봤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더니 어느새 정상이 코앞. 어제 J씨의 증언에 따르면 정상에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우동을 8천 원이나 받고 판다고 해서 아침에 싸 온 샌드위치를 미리 먹었다. 배가 고프면 이성을 잃고 사 먹을 수도 있으니까. C님이 샌드위치 싸준다고 하실 때 안 먹을 것 같다며 극구 말렸는데, 눅눅해진 토스트가 어쩜 그리 맛있던지. 안 싸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드디어 이화령 정상에 도착했다! 예상시간 대비 무려 한 시간 반을 단축했다. 미친 거 아니야? 저도 제가 이걸 해낼 줄 몰랐습니다. 원래 8시 반 도착 예정이었는데 한 시간 반을 남겼으니 이후로는 페이스만 잘 유지해서 걸으면 무난히 도착할 것 같았다. 뛸 듯이 기뻤다.
10년 전에 저 사진 찍을 때 자꾸 차가 오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서 엄청 뻘쭘했는데, 터널 뒤쪽에서 찍으니 차도 사람도 거의 없어서 찍을만했다. 인증센터에서도 한 장 찍어주고, 구경할 겸 정상 휴게소에 들렀다.
메뉴를 보니 과연 8천 원짜리 우동이 있다. 이건 예상했으니 쉽게 패스가 가능했다. 그런데 문제는 <꿩 만두>도 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꿩에 미쳐서 이렇게 걷고 있는데 꿩 만두를 판다굽쇼? 한번 먹어보면 좋지 않을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오늘 저녁에 꿩고기를 못 먹게 될 수도 있잖아. 이성을 찾기 위해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왔는데, '꿩'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브레이크가 부서져 버렸다.
"꿩만두 하나 주세요."
"만두? 우동이 더 맛있어요 우동 드세요."
"아뇨 만두로 주세요."
일하는 아주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두를 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음식 가져다주는 아저씨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라. 왜일까. 우동이 마진이 잘 나오는 걸까. 아니면 우동이 잘 나가서 꿩만두는 냉동실에 오래 방치되어 왔던 걸까. 미심쩍었지만 일단은 만두를 받아 들었다.
모두의 우동 추천을 거절하고 마침내 받아 든 꿩만두 후기: 짜다...
그냥 좀 부드러운 닭고기만두 같달까, 그런데 간이 너무 셌다. 우동이랑 같이 먹었으면 맛있었을 수도... 만두 시키지 말라고 말리기보다 만두 맛을 개선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슬슬 하산을 해 본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충청도에 입성했다. 길고 길었던 경상도, 이제는 안녕.
전체 구간을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이제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만 걸으면 곧 완주다. 힘내보자!
내려가는 길에 10년 전 사진 찍었던 데크를 발견해서 한 장. 눈이 왔던 10년 전과는 달리 이날은 해가 쨍쨍하니 덥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우비를 깔고 눈썰매로 내려갈까 했다. 수천 번을 고민하다가 결국 우비를 깔고 앉았는데, 썰매가 되기에는 얇았던 것인지 아니면 경사가 충분히 가파르지 않았던 건지 전혀 움직이지를 않아서 그냥 눈바닥에 앉은 사람 되었다. 결국 주섬주섬 일어나서 성실하게 걸어갔다는 이야기.
이상하게 내리막길을 걷는데도 무릎이 딱히 아프지 않았다. 한때는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배낭도 이제는 무게가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나, 강해졌나 보다. 길 위에서.
잠깐 앉아 쉬었다. 누군가 만들어둔 반쯤 녹은 눈사람이 말벗이 되어 주었다.
산에 둘러싸인 풍경이 참 멋지다. 새재길을 걷는 내내 만족스러웠던 풍경. 걷다가 맞은편에서 마라톤 준비를 하는 듯한 아저씨 세 명을 마주쳤다. 걸어서 올라도 힘든 고개를 뛰어서 오르다니. 역시 체력은 나이순이 이 아니다. 나부터도 스무 살 때보다 체력 떨어졌다고 징징대고 있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관리했다면 오히려 그때보다 덜 힘들게 가고 있겠지.
나는 내리막길을 마무리함으로써 이화령을 졸업하고 평지를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비현실적으로 좋아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음. 국토종주 첫 번째 외상. 핸드폰을 보면서 걷다가 도로의 단차를 보지 못하고 엎어졌다. 그냥 넘어진 것도 아니고, 배낭 무게 때문에 상체를 가누지 못하고 머리까지 박아서 손과 이마가 다 갈렸다. 머리 못 가누는 신생아가 된 기분이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외진 곳이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항상 '도로를 걸을 땐 핸드폰을 보지 말고 안전하게 걷자'라고 다짐하면서, 결국에 핸드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다니 너무 민망했다.
수안보가 10km 남았다. 이러다 정말 해지고 도착하는 거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슬슬 몸도 다리도 피로해지기 시작했기에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고 있으니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길과 가까이 닿아 있는 축사는 또 처음이다. 내가 소들을 보듯이 소들도 나를 본다. 소도 나를 보고 새도 나를 본다. 인적이 드문 길들을 걷고 있지만 나는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두 번째 오르막길에 진입했다. 이화령만큼 가파르고 높진 않지만 그래도 제법 오래 걸어줘야 하는 길이다. 가까운 곳에 마애이불병좌상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보고 싶은데, 멀리 있겠지?' 하며 포기했는데, 얼마 안 가 거대한 마애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10년 전에도 이걸 봤으려나? 찾아보니 이런 글을 써 두었다.
10년 전에도 넘어졌다고 하네요. 하여간 우당탕탕 국토종주다.
어제 눈이 왔음을 흔적으로만 확인하고 있다. 근사하게 녹고 있었던 바위 위 얼음.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바로 뼈. 뼈 자체야 뭐 갈비탕만 먹어도 나오는 것이니 색다를 것 없지만 이것은 아마도 이 자리에서 죽은 어떤 야생동물이 그대로 부패해서 남은 뼈일 것이기에 매우 신기했다. 시체 자체를 볼 일이 흔치 않으니까. 길가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 아래 하천을 내려다보다가 우연히 발견했기에 더 신기했다. 30초만 늦게 봤어도 발견을 못 했을 것 아닌가.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는 청소년 고라니가 아닐까 싶었다.
여러모로 으스스한 고개. 저 멀리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쉬어갈까 하고 신나게 걸어왔는데, 무슨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도난방지 레이저마냥 멀리서는 안 보였던 거미줄 천만 개가 공간을 가득, 말 그대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징그럽다기보다도 너무 비현실적이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걷다 보니 별 광경을 다 본다.
결국 정상쯤 가서 있는 멀끔한 벤치에서 휴식을 취했다. 망고 젤리를 까먹었는데 너무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이때까지 먹어본 젤리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맛있었다.
슬슬 해가 지고 있다. 거의 다 오긴 했지만, 역시나 해 떨어지기 전에 수안보에 도착하는 건 무리였구나. 어둑해지는 산길을 마저 걸어내려 갔다.
숲에서는 정말이지 많은 소리가 난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나 꽤 큰 무언가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정말 자주 들린다. 지금처럼 빛이 있을 때야 돌아보고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해가 다 떨어져서 어두울 때는 그것이 산짐승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데 난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꽤나 으스스하다.
밭 사이를 걷다가 예쁜 초승달이 뜬 것을 발견했다. 정월대보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얄쌍하고 예쁜 손톱달이 되었다.
정말 거의 다 왔지만 몸이 힘들어서 쉬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아무도 없는 마을 한가운데에 평상이 놓여 있길래 벌렁 드러누워 골반 스트레칭을 하며 쉬었다.
어느새 캄캄해진 세상.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입을 헤 벌리고 한참을 보았다. 겨울철 늦은 시간에 퇴근할 때 올려다보면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며 위안을 주던 오리온자리가 이날도 잘 보인다. 오리온자리,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자리... 짧은 지식으로 아는 모든 별자리를 찾아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드디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수안보에 도착했다. 8시 반 예상되었던 거리를 성큼 걸어서 7시에 도착! 예약 시간까지 많이 남아 있어서 인증센터를 들렀다 와도 될 것 같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루어낸 스스로가 매우 기특.
사진 찍기가 매우 수줍었던 것 치고 귀엽게 찍은 10년 전 사진도 한번 재현해 주고.
십이지신 동상 중에 돼지띠를 골라 찍었던 사진도 재현해 준다. 당시에는 2019년이 오지 않은 미래였을텐데,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다시 올 때는 2031년도 그렇게 되어 있겠지. 지금은 아득한 미래인데 말이다.
드! 디! 어!!!!!!!!!!!!!!!!! 제가 꿩고기를 먹으러 왔습니다!!!!!!!!!!!!!!! 10년간 맺혀 있었던 한풀이 프로젝트, 드디어 완수-☆ D언니가 조금 늦는다고 해서 미리 들어와서 앉아 있었다. 맛집인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식사 중간에 워크인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신발도 못 벗고 나가야 했다. 예약하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걷다 보면 꿩이 푸드드득 꾸르르륵 날아오르는 소리에 깜짝 놀랄 때가 많은데, 그 꿩을 맛보러 왔다. 후후 꿩 놈들, 나를 놀래켰겠다, 맛있게 먹어주겠어...
꿩불고기, 꿩샤브샤브, 꿩만두, 꿩육회, 꿩완자전, 꿩산적, 꿩칼국수, 꿩탕수육까지 8가지 꿩고기 요리를 코스로 즐길 수 있다. 가격은 인당 35,000원. 대망의 꿩고기 맛은... 정말 솔직히 말하면 '으아니 세상에 이런 진미가! 美味!!!!!'를 외칠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소고기 내지 돼지고기 느낌이다. 닭보다는 촉촉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나는 티끌만 한 실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 목표는 '꿩고기 먹어보기' 였지, '맛있는 꿩고기 먹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맛이야 어떻든 꿩고기를 못 먹어본 것이 한이었고 이제 먹어봤으니 되었다. 그리고 이곳 엄청나게 친절하진 않았지만 솜씨가 좋아서 음식도 대체로 맛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멀리 청주에서 와 준 D언니에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제 어디에서 자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10년 전과 이번 종주 때 같은 동네에서 자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에는 온천랜드 찜질방에서 묵었는데, 그곳은 코로나 때 문을 닫았다고 한다. 목욕탕으로 추천을 받은 낙천탕은 이미 문을 닫아서 갈 수 없었다. 좀 좋은 곳에서 잘지,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저렴한 모텔에서 잘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어차피 이 근방에 있는 곳은 다 수안보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잠만 자고 나갈 것 큰돈 쓰면 아까울 것 같아서였다.
체크인을 하려는데 카운터에 아무도 없어서 벨을 누르니 옆에 있는 방에서 사장님이 나와 방 키를 건네주셨다. '운동선수예요?' 하고 물어보셔서 그냥 직장인이라고 했는데, 무엇을 보고 운동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신 건지 궁금했다. 아마 머리가 짧아서 그런 거겠지?
욕조에 물을 받아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엄청났던 하루를 반추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모두 다 잘 끝났다. 남은 거리는 208.6km, 남은 내 연차는 6일. 하루에 35km씩은 걸어주어야 기간 내에 완주할 수 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까?
일단은 눈앞에 있는 길들을 충실하게 걸어내기로 다짐했다. 기한 내에 못 끝내면 나중에라도 마무리하지 뭐. 중요한 건 중단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꾸준히 걷는 거니까. 10년 전과는 달리, 나는 선명한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이 여정을 시작했으며, 어떤 꾀도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모든 걸음을 걸어내고 있다. 앞으로 남은 6일간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됐다. 나는 따끈해진 몸을 뽀송하게 말려서 이불속에 밀어 넣고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