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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Oct 31. 2024

발목 잡는 풀줄기들을 헤치고, 다시 집으로

국토종주 16일 차, 양평 구간



일찌감치 나갈 채비를 마치고 핸드폰을 보니 꺼져 있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부팅을 했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었다. 아뿔싸, 모텔 충전기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콘센트 자리가 없어서 내 충전기를 안 쓰고 모텔에 설치된 충전기에 보조배터리와 핸드폰을 둘 다 연결해 놓고 잤는데, 그 무엇도 충전이 안되어 있었다.


배터리라도 완충이었다면 큰맘 먹고 나갔겠지만 사용할 수 있는 전자기기가 아예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모텔에 늦은 시간까지 머물러야 했다. 참 가지가지 방법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싶었다.



배터리는 다 못 채웠지만, 핸드폰이 100% 차서 체크아웃을 했다. 더 미루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걸어가는데 빵집이 있어서 괜히 한번 들러 보았다.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빵이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참지 못하고 두 개를 샀다. 마늘빵으로 유명한 빵집인지 유명인 싸인도 많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당황. 돌아가서 하나 더 사 올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새우 마늘빵인가 하는 거였는데 재료도 실하고 양도 넉넉했다. 갓 나온 참이라 휴식할 수가 없어서 걸으면서 길빵을 했다.



꽃 뽑아가지 말라며 각종 험악한 문장으로 협박하는 팻말은 자주 봤지만 뽑아가라는 문구는 또 처음이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인지 길이 너무 질어서 걷느라 힘들었다. 자전거길이 없어서 갓길을 걸었는데, 자꾸 발이 미끄러지고 신발에는 진흙이 잔뜩 묻었다.



이포보에 가까워지니 막국수집이 많이 보인다. 막국수로 유명한 고장인가 보다. 검색에 검색을 더해 루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으면서 평이 좋은 집을 골라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입구에 국토종주길의 아버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싸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아니 얼마나 맛있는 집이길래 대통령까지 들렀다 갔담. 기대 잔뜩 하고 입성.



수육이 너무 먹고 싶은데 막국수집이니 막국수를 빼놓을 수 없어서 둘 다 시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막국수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빵 때문에 배가 불러서 그랬는지, 막국수를 다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수육만 겨우 다 먹고 국수는 거의 남겼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남기고 온 막국수가 너무 그립다)



식당을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 이포보 인증센터가 보인다.


10년 전보다 더 귀엽게(?) 찍힌 사진


인증 도장도 후딱 찍어주었다. 날씨가 구렸던 10년 전과 달리 하늘이 맑아 기분이 좋았다.



5000보를 걸으면 핸드폰에 알림이 온다.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아침에 이 알림을 받았다. 평소에는 저녁에 받는 게 일반적이었고, 아예 못 받는 날도 제법 됐다. 대체 얼마나 안 걷길래. 다시 돌아가면 운동량은 다시 줄어들겠지. 그간 늘려 온 체력과 근육이 아깝게 느껴졌다.



작은 마을을 지나갔다. 지도를 보면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마을이었다. 도시에서는 지도에 없으면 세상에 없는 것인데, 국토종주를 하는 동안 '그곳에 가봐야만 보이는' 공간과 가게들을 많이 만났다.



피곤하던 참에 마침 가마우지 떼가 보이는 벤치를 만나 타이머를 맞춰놓고 10분을 잤다. 커피를 안 마시니 확실히 졸리다. 다리도 금방 아픈 것 같고. 카페인의 위력을 실감했다.



쌀밥이 맛있고 비가 와서 힘들었던 여주 안녕. 경기도 양평으로 진입했다.



어마어마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근사한 전원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경기도에 진입한 이후로 이런 별장인 듯 은퇴 후 집인 듯한 조용하고 멋진 집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주치면 고마운 공중화장실. 볼일을 보고 재정비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흐렸던 날씨가 양평 들어오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제법 멋진 하늘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남한강-북한강 구간은 '이게 자연의 아름다움이구나!' 하고 감탄할 만한 장면들이 여기저기 많다.



자동차, 자전거 그리고 농부(?)가 함께 나누는 길. 아마 트랙터 등 농기구가 지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겠죠.



10년 전 국토종주 때 찍은 것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진인데 이 길을 이미 지나쳤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원주를 향해 눈물의 밤길 걷기를 하며 지나와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대략 비슷해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양평 시내에 가까워지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학생들도 심심찮게 마주쳤다. 근처에 조정 연습장이 있어서 훈련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도 한 무리 지나쳤다. 길에서 젊은 사람들을 보는 게 이렇게나 생소할 수 있다니. 부산에서 출발했을 때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참기름을 짜는지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 방앗간. 어릴 때 엄마가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이며 쑥떡이며 뽑아다가 친척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옛날 가게'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는 요즘 아직까지 건재하게 굴러가는 방앗간들이 많아 반가운 마음이다. 심지어는 내가 사는 큰 도시에서 참기름 짜는 방앗간이 있다. 언젠가는 짠 기름을 사서 먹고 싶다.



비주얼을 보고 반해서 꼭 먹어야겠다며 굳이 굳이 찾아온 떡볶이집. 점심 먹기에는 늦고 저녁 먹기에는 이른 애매한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가게 직원 모두가 두 손을 꼭 맞붙잡고 수영 대회 생중계에 등장한 황선우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5위라는 결과가 뜨자 아쉬움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떡볶이는 국물이 충분히 배지 않아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였다. 떡볶이가 탄수화물과 당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건강식단과는 정반대 개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쨌거나 맛은 있었고, 6시에 닫는 집이기 때문에 와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10년 전 국토종주를 하며 집을 나온 첫날 아침에 지나쳤던 양평군립미술관. 지도로 보고는 꼭 들러봐야지 했는데 당시에 '후줄근한 차림새가 민망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지금 와서는 미술관 구경하는데 차림새가 대체 뭔 상관이람 싶지만 그때는 그런 게 참 중요했다.


이번에야말로 구경해볼까 싶었지만 미술관 관람 자체도 걷는 일인지라, 그 힘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지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언젠가 또 와볼 일이 있겠거니 하며 아쉽지만 패스.



예전에는 양평군립미술관 인증센터였는데 위치를 옮겼는지 양평자전거길쉼터가 되었다. 양평에 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고, 여기저기에 홍보 포스터도 있는 걸 봐서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로 프레이밍을 시작한 모양이다. 아무튼 뿌듯한 마음으로 인증 완료.



드디어 남은 거리 세 자릿수가 깨졌다. 이제 99km만 더 걸으면 된다!


사탄천 같은 이름이 아직도 웃긴 나


해 지는 장면이 근사해서 한 장 찍어보았다. 생각보다 멋지지 않아서 왔다 갔다 하며 여러 장을 찍은 덕분에 이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왼쪽이 국토종주 중에 찍은 사진, 오른쪽이 2023년 4월에 찍은 사진


편의점이 어째 낯이 익다 했더니 작년 4월 설매재 백패킹을 왔다가 하산해서 곰탕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던 집이다. 이곳에 또 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국토종주를 하며 와본 곳을 지나가고, 또 살다가 우연히 국토종주할 때 걸었던 길을 지나가는 일이 가끔 있다. 국토종주의 또 다른 매력이랄까. 길가에서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마저 어찌나 그리웠는지.



양평 구간에서 온갖 센세이셔널한 구조물들을 다 보는 듯. 가파른 계단 때문에 자전거종주였다면 지나가지 못했을 길.



10년 전 종주할 때는 터널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당시에는 터널 때문에 국토종주를 못 하겠다 생각할 정도로 겁이 났다. 정확한 이유는 그때도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영향이 있었다. 이후로는 없지만 양평 구간에는 터널이 꽤 많이 있어서 곤욕이었다.


과연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뭐가 그렇게 무서웠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쌩쌩 지나다니는 차들과 '쟨 뭘까' 하는 시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편했다. 고요한 마음으로 터널 구간을 무사히 걸어냈다.



해가 거의 넘어갔다. 힘이 들고 발목이 아팠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고민을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숙박할 것인지. 이때까지 지나온 동네들에 비하면 훨씬 번화한 곳이라 숙소는 많았다. 문제는 전철이 다니는 지역에 도달했다는 데 있었다. 선택지에 '집에 가서 자기'가 추가된 것이다.


외박을 하루 추가할 것인가,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전철 타고 올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집에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숙박비가 한두 푼이 아니기도 하고, 컨디션도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숙박을 위해 이고지고 다니던 짐들을 집에 두고 가볍게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집에 가자! 옷도 갈아입고, 배낭도 비우고! 오가는 시간이 있지만 어차피 숙소에 가도 기본적으로 두 시간은 쉬면서 보내니, 그 시간 동안 전철을 타면 될 일이었다. 신원역까지 걸으면 세 시간쯤 걸릴 것 같고, 마침 9시에 전철이 오니, 타고 가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해가 지니 길이 어마어마하게 어두워졌다. 경기도에서도 이런 어두운 길을 걷게 되는구나. 왼쪽 사진은 바닥이고 오른쪽 사진은 하늘이다. 밝게 뜬 달만이 그 차이를 보여준다.



너무나도 시도해보고 싶은 그 이름... '국수리 국수집'. 하지만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가는 전철을 놓치게 될 것 같아 아쉽지만 패스.



신원역까지 가는 길이 좋지 않아서 한참 고생을 했다. 길이 어두운 것은 둘째 치고, 자전거길 중간에 공사를 한답시고 뚝 끊어 놓았는데 우회로 안내가 안 되어 있어서 네이버 지도에 의존해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이 위험천만한 국도 갓길이었던 거죠. 도보로 걸어갈 만한 길이 아니었던지라 등에 식은땀이 잔뜩 났다. 돌아가자니 공사 중이라 길이 없고, 다른 길을 찾자니 횡단보도가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도로를 따라 산을 따라가는 자전거길이 잘 닦여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엄청나게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차에 스칠 것 같아서 가드레일에 딱 붙어 걸었다.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자꾸만 발목을 붙들었다. 멈춰 설 수도 허리를 숙일 수도 없어서 그냥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마침내 만난 인도, 그리고 반가운 횡단보도. 정신을 차려보니 손목에 걸고 다닌 마스크에 풀이 뿌리째 뽑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던 현장의 증거물이랄까.



드디어 도착한 신원역. 아- 수도권 전철역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내일 신원역에 다시 와서 여정을 이어갈 예정. 제시간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전철을 탈 수 있었다.



한때는 일상이었던 이 전철 안 모습이 어마어마하게 반갑게 느껴졌다. 서서 가야 했다면 너무 괴로웠을 테지만 다행히 자리가 많았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인구밀도가 늘어났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왔다. 어딘가에서 향수 냄새가 났다. 내 옷에서 나는 땀과 담배 냄새와 대비되는 향이었다. 길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는데. 도시에서는 더 많은 냄새가 나나 보다. 아니, 더 많은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냄새인 건가. 이곳에는 탄내와 비료 냄새가 없으니까.


16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하고 안전한 내 작은 집.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안도감이 밀려왔다. 출발 전에 빨아서 널어 둔 이불이 며칠간 햇빛을 받고 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침대 위에는 짐을 싸며 덜어낸 양말과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샤워를 하고 잘 마른 이불 사이에 몸을 집어넣었다. 집이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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