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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삭 Jan 22. 2024

빼빼로를 먹는 방법

“당 떨어졌어”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곧 관용어로 등재될 법한 요즘 말이다. 의학적인 저혈당 증상을 호소하는 말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더 이겨낼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다. 당 충전에 가장 효과적인 과자를 꼽으라면 나에게는 빼빼로만 한 게 없다. 발만 남기고 검정 초콜릿 타이즈로 무장한 그 날씬한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방전 직전의 에너지가 일시적으로 끌어올려진다. 

최근 일하러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서 앉아 있을 때면 ‘빼빼로 한 입만 먹으면 더 집중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날도 빼빼로 한 입을 상상하며 집중력을 끌어모으려던 차에 초록색 직사각형이 스쳐 지나간다. 맞은편의 남성은 몇 시간 후 당이 떨어질 것을 예측하고 당 충전용 아몬드 빼빼로를 손에 쥐고 온 것이다. 당장 내 것이 아니라도 바라만 봐도 이렇게 설레다니! 돌아오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삼총사 빼빼로(오리지널, 누드, 아몬드)를 사서 며칠째 야금야금 먹고 있다. 


자주 먹는 과자라서 과자에 대한 글을 쓰기로 시작할 때부터 꼭 한 번은 빼빼로에 관해 다루고 싶었으나 빼빼로는 과자라고 하기에는 우리나라의 문화 변천사를 담고 있는 거물급 과자이기에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다. 언젠가 빼빼로에 관한 글을 끄적였다가 마무리까지 짓지는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빼빼로가 다른 과자와 탁월하게 구별되는 점은 국가공휴일에 버금가는 기념일, 11월 11일 빼빼로데이까지 제정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1999년부터 빼빼로데이를 본떠 같은 날 포키&프릿츠데이를 만들었고 일본 역시 그 시기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문화 수출까지 했으니 외교적 역할도 해낸 과자인 셈이다. 빼빼로데이의 기원은 1990년대 초 부산 지역에서 시작한다. 여고생들이 다이어트에 성공한 기념으로 빼빼로 과자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부산 지역 판매지부에서 본격적으로 이를 마케팅에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이전의 우리나라 경제 수준은 끼니 해결조차 어려웠기 때문에 먹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죽했으면 “진지 잡수셨어요?”가 “안녕하세요”와 같은 의미였을랴. 오늘날 더는 상대방의 끼니를 걱정하는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다. 1990년대 국민소득이 어느 정도 반열에 올라서면서 잘 먹어서 후덕하고 뚱뚱한 게 미덕이 아니라 적당히 먹어서 날씬하고 마르기까지 하면 더 좋은 시대가 되었다. ‘웰빙’이라는 신조어가 나타났고 외래어 ‘다이어트’가 일상적인 용어이자 문화로 자리했다.

여고생이면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고 또래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들에게 ‘빼빼’하다는 말은 살가죽이 쪼그라져 붙을 만큼 야윈 상태에 있다는 안타까운 말이 아니라 부러워하고 축하할 만한 상태였다. 마른 것은 빈곤의 상징이 아니라 성공적인 자기 관리였다. 


30년 넘게 한국사회에서 빼빼로데이의 위상은 건재하다. 빼빼로가 들어간 온갖 선물세트가 곳곳에서 보이고 전혀 살 생각이 없다가도 종류별로 총망라된 빼빼로 가족을 보고 있으면 안 사는 내가 특이하게 여겨지면서 어느새 계산대에 빼빼로를 올려놓는다. 회사 등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면 빼빼로데이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상사라면 평소에 엄하게 했던 직원들에게 츤데레의 느낌으로 하나씩을 안겨줘야 하고 막내급이라면 이런 것도 챙기는 센스 있는 동료라는 인식을 주려고 챙기게 된다. 빼빼로데이에 맞춰 패키지도 변화했다. 제일 뒤편에는 “To-” 기재되어 있어 간단한 메모를 할 수 있는데 이것마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소비자를 위해 옆면에는 받는 사람에 따른 다양한 문구를 적어놓았다.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요소가 더해지니 가볍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기에도 좋다. 포장지에 이런 기능적 요소를 넣은 다른 제품으로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고래밥(시대의 흐름에 맞춰 작년 6월부터는 고래밥 캐릭터 메모리 카드로 바뀌었다)이 있다. 

인기가 빼빼로의 끊임없는 진화를 독려한 것인지 빼빼로의 진화 덕에 계속 인기가 있는 것인지 선후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빼빼로만큼 그 종류가 다양한 과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얼핏 떠올려지는 빼빼로의 종류가 몇 가지가 되는가? 

다음 종류의 빼빼로를 알고 있다면 빼빼로를 눈여겨봤다고 할 수 있겠다. 녹차로 출시되었다가 단종되고 최근에 해남녹차로 출시된 빼빼로를 본 적이 있거나 누드 크림치즈, 크런키 그래놀라 버전이 떠올려지는가? 감귤, 딸기, 고깔콘, 티라미수 빼빼로까지 기억한다면 빼빼로에 일가견이 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리지널, 아몬드, 누드(녹차누드와 같은 다른 종류의 누드 빼빼로가 생기면서 작년부터는 초코필드로 개명했다)가 제일 많이 보인다. 종류가 더 많이 구비되거나 대망의 빼빼로데이가 다가오면 화이트쿠키, 초코쿠키, 크런키, 딸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다. 이미 검증된 다른 과자들과의 콜라보도 활발하다. 크런키 빼빼로를 비롯해 고깔콘, 월드콘, 죠스바, 돼지바 빼빼로가 선을 보였다.


편의점마다 빼빼로 개선문을 만들어 놓는 시기가 되면 이성 간에 아직 연인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볼 수 있겠다. 이제 막 불씨가 붙은 이들에게 다음 해 봄의 화이트, 밸런타인데이는 너무 멀기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알아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빼빼로데이를 활용할 수 있겠다. 너무 달달한 초콜릿, 사탕을 주고받아도 되는 관계인지 완전히 달지는 않은 초콜릿과자를 주면서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우리나라가 ‘정’에 약한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남은 과자들은 같이 먹기를 강조해 왔다. 우리나라 과자계의 시조새인 초코파이는 한결같이 ‘정’을 강조하고 투유 초콜릿은 이름부터 ‘To you’다. 혼자 먹는 과자는 배부르긴 하지만 같이 먹을 때의 만족감을 채우기는 어렵다. 나는 한 봉지에 8개밖에 든 아몬드 빼빼로의 개수에 늘 불만을 품어 입에 대지 않지만, 빼빼로는 아몬드만 먹는 그를 위해서 내가 먹을 오리지널 빼빼로를 살 때 같이 산다. 그 혼자만 먹으라고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간식 창고 구석에 숨겨둔 아몬드 빼빼로의 빈 봉지가 차에 있다. 

“아이들과 같이 나갔다 왔잖아. 설마 8개밖에 안 되는 그걸 아이들과 같이 먹은 거야?”

“아, 8개야? 셋이서 잘 먹기만 했는걸.”

누가 3개를 먹었을까 하고 개수를 따지는 내 앞에서 그는 아무런 셈이 필요 없는 대답을 한다. 


오늘도 과자를 먹는 방법을 이렇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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