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의 감자와 파인애플을 소개합니다

화상회의의 꺼진 카메라와 마이크로 고통받는 당신을 위해

by 날찌

갑작스러운 코로나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시작된 재택근무. 집에서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처음엔 여느 전염성 질병들이 그렇듯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하며 그럭저럭 불편한대로 버텼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사그라들기는커녕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람다 오미크론 까지 세를 확장해가는 코로나의 기세에 결국 우리는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제 재택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겠구나.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수많은 재택러들은 그동안 '불편했던 것'들은 빠르게 개선해 나가고, 재택이라 더 '좋았던 것'들은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회사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도 한없이 올라가는 승모근과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지키기 위해 모니터, 의자, 책상을 차례로 구매했다. 그리고 물리적인 출퇴근이 없어진 만큼 그 시간을 활용해 운동이나 자기 계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덕분에 직장 생활하면서 언감생심이었던 아침 수영을 다니고 있고, 저녁에는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그렇게 출근하는 날보다 재택 하는 날이 업무효율이 더 좋아지고 있는 요즘, 아직까지도 좋고 싫음 경계 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화상 회의이다.


화상회의의 명(明)


일단 화상 회의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 오프라인 회의 잡는 걸 생각해보자. 회의 참석 인원을 고려해 회의실을 잡아야 하는데,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선택지는 좁아진다. 회의 참석자 모두의 시간이 비어있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회의실이 딱 비워져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의 회사는 사무실 건물이 4개 정도로 분산되어 있다. 주로 협업이 필요한 부서끼리 한 빌딩에 모아두기는 하지만 간혹 다른 빌딩에서 근무하는 팀과 회의를 할라치면 빌딩 간 이동이 불가피해 회의 앞 뒤 이동시간이 회의시간보다 더 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렇게 회의 앞 뒤 이동시간을 고려하다 보면 연달아 진행하는 회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에 비해 화상 회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어 쉽고 빠르게 회의를 주최하고, 회의가 마친 뒤에도 빠르게 각자의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가끔 회의를 잡을 정도는 아닌데 텍스트보다는 목소리로 논의하면 금방 끝날 것 같을 때에는, 사무실에서처럼 잠깐 자리로 찾아가 질문하던 경험과 유사하게 슬랙(slack)에서 제공하는 허들(huddle)을 활용한다. 덤으로 허들에서 제공하는 스크린 공유 기능을 활용해 띄우고, 스크린을 화이트보드 삼아 바로 옆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느낌을 내기도 하는데, 사무실에서 옆 자리에 앉은 분들에게 본의 아니게 업무 방해를 하게 됐던 걸 생각하면, 화상 회의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화상 회의 예찬론자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가끔 ‘미치도록’ 오프라인 회의가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바로 회의 참석자 모두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모두 꺼져 있을 때다.


화상회의의 암(暗)


기획이라는 직군 특성상 회의를 주관하고 리뷰하는 경우가 많은데,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곤 해 처량해진다. 물론 나도 가끔 늦잠을 자는 날이면 씻지도 못하고 바로 책상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기도 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켜지 않는 것도 공감하고, 혹시라도 가족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잡음이 새어 들어갈까 마이크를 꺼두는 것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에서 1시간 가까이 혼자 떠들고 있으면 ‘이럴 거면 차라리 녹음해서 틀어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현타가 오면서, 리뷰하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오프라인 회의에서는 참석자의 얼굴 표정이나 제스처를 살펴볼 수 있어서, 리뷰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시그널이 읽히면, 회의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그 부분을 다시 설명하고, 아예 설명을 멈추고 질문이 있으신지 중간중간 점검하면서 갈 수가 있는데, 비디오와 마이크가 꺼져있는 화상 회의에서는 그 시그널을 전혀 감지할 수가 없다. 답답한 건 참석자도 매한가지인대, 다른 사람들도 다 이해를 못하는 건지 자신만 이해를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잠자코 있게 되고, 결국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 채로 회의가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PM으로서 이런 상황을 좌시하기 어려웠다. 일은 해야 하니까! 왜 옛말에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 2년간 나만의 방식으로 팀 내 화상회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해봤는데, 그중에 가장 효과적이었고 팀의 분위기까지도 좋게 만들었던 방법 하나를 공유하려고 한다.




필터라는 신세계


어느 날이었던가, 회의 참석자 중 한 분의 볼 위에 하트가 뿅뿅 올라가 있는 걸 발견했다. 뭐지 저 뽀샤시한 효과는? 어떻게 한 건지 확인해보니 snap camera라는 서비스를 다운로드하여서 화면에 필터를 입힌 거였다. 처음에는 나도 조금 뽀샤시하게 보이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운로드했는데, 서비스 내에 있는 다양한 필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양한 필터의 홍수 속

화면에 컬러만 입힌 가벼운 필터

얼굴에 선글라스, 모자, 안경 같은 걸 가볍게 얹은 필터

엽기적으로 얼굴을 구겨버리는(?) 필터

눈코 입만 빼고 얼굴을 모두 덮어버리는 마스크 필터

얼굴을 애니메이션화 한 필터


이중에 어떤 필터를 써볼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필터 선택에도 원칙이 있다


처음에는 좀 뽀샤시한 컬러 필터에서 가볍게 안경을 쓰고 있는 필터로 넘어갔는데, 나중에 얼굴이 엉망인 상태로 카메라 앞에 앉아야 할 때는 얼굴을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처럼 만들어주는 필터를 사용했다. 디즈니 주인공 얼굴처럼 눈이 큼지막하고 턱선이 갸름한 게 만족도가 꽤 높았다. 이렇게 여러 필터들을 경험하면서, 필터를 선택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 하나 생겼는데, '눈코 입이 보이고 얼굴의 움직임이 보이는 필터'를 선택한다 였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이자 심리학자인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 1939 ~ )이 발표한 이론으로 상대방에 대한 인상이나 호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목소리는 38%, 보디랭귀지는 55%의 영향을 미치는 반면, 말하는 내용은 겨우 7%만 작용한다는 이론을 말한다. 즉, 효과적인 소통에 있어 말보다 비언어적 요소인 시각과 청각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라비언의 법칙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메라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표정, 용모, 복장, 자세, 움직임과 같은 시각적 요소가 커뮤니케이션의 55%를 차지한다. 즉 화상 카메라를 끄면 55%의 커뮤니케이션 loss가 발생할 수 있고, 카메라를 켠다 하더라도 표정이나 움직임을 확인하기 어려운 필터를 쓸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눈코 입으로 놀라움, 이해 안 됨, 신남을 표현할 수 있는 필터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재미 한 스푼


그렇게 필터 사용이 익숙해질 즈음, 나는 여기에 조금 재미있는 시도를 해보고 싶어졌다. 온라인 회의로만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정말 정적인 분위기에서 딱딱하게 일 얘기만 하다가 끝날 때가 많은데, 오프라인에서 얼굴 보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시작하던 회의가 점점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snap camera를 켜보면 좀 어이없게 웃긴 필터들이 많은데, 심혈(?)을 기울여 감자 필터를 선택했다.

애정 하는 감쟈 필터들


처음에는 조금 편한 분위기의 PM 직군 정기회의에서 시도해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눈코 입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감자 몸통은 부드럽게 웨이브로 움직였다. 머리나 가방이 있는 감자인 경우엔 움직일 때마다 머리와 가방이 찰랑찰랑 거리는데, 덕분에 웃음으로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고, 시작부터 모두가 웃고 몸의 긴장도 한바탕 풀고 회의를 시작하니 회의도 부드럽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에는 용기를 내어 여러 직군이 모여있는 팀 데일리에서도, 자주 협업하는 타 팀과의 회의에서도 감자 필터를 켜봤고, 거의 모든 회의를 유쾌한 웃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항상 엄근진이었던 동료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나 웃는 소리를 듣게 되면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snap camera에서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 다양한 신상 감자 필터가 생겨나면서, 나의 감자 필터 신공도 점점 농익어갔다.

애정하는 감자 필터들


감자, 파인애플, 블루베리, 꿀벌들의 잔치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팀의 화상회의에 파인애플이 등장했다. 필자가 감자 필터에서 파인애플 필터로 갈아탄 거냐고? 천만의 말씀. 같은 팀의 다른 PM이 파인애플 필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블루베리, 꿀벌까지, 필터를 활용한 화상 회의는 팀의 즐거운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어떤 때는 이게 너무 익숙해져서 처음 협업하는 팀과의 화상 회의에서도 필터가 켜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참석한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대체로 즐거워하시는 경험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면 '이 팀 유쾌하네'라는 인상을 받으셨다고 하더라.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분들 중에 한 분은 나중에는 식빵으로 등장해주셨다 ㅎㅎㅎ)


전사 발표에서 샘플로 등장한 감자 필터


물론 어떤 분들은 예의 없다고 생각하시거나, 회의 분위기를 너무 저해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거면 그냥 씻어라라고 이야기하는 분도 봤다. (씻긴 씻…어요) 다 맞는 말이다. 사무실에 출근할 때처럼 단정한 매무새를 갖추고 예의를 갖춰 화상 회의에 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재택이 일상화되면서 생기는 변수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방법을 찾아보고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를 켜기 힘든 당신!
Shall we potato?


우리 팀의 감자와 파인애플을 소개합니다

Photo by Sigmund on Unsplash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