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설렌다 | 이제 그만 안녕을 고한다
나는 한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를 먹어야 하는 흔히들 말하는 얼죽아다.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타서 한 모금 마셔야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내가 물이고 커피고 모든 음료를 굉장히 느리게 마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나에게 컵받침은 필수다. 컵 표면에 생긴 물이 흘러내려 테이블이 흥건해지기 일쑤니까. 특히나 일을 하는 책상 위로 컵을 가져올 때는 컵받침을 꼭 받쳐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어김없이 아이스커피를 마시다 문득 이 컵받침이 어떻게 내 수중으로 왔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돈 주고 구매한 컵받침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지금 내가 쓰는 컵받침의 출처를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하나는 ‘YES, I AM A COFFEE HOLIC’이라는 문구가 써져 있다. 아마도 지인에게 원두 선물 세트를 받았을 때 그 안에 들어있었던 거 같다.
또 다른 하나에는 “절구(?)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래 ‘Rooibos Organic’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문구를 보고서야 절구가 아니라 찻잔에 스푼이 들어가 있는 그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도 지인에게 루이보스 티 세트를 선물 받았을 때 들어있던 거다.
마지막 검은색 컵받침은 두께가 도톰하지만 나름 잘 마르는 소재로 되어 있어 제가 최근 가장 애용했던 거다. ‘DURGOD’라는 글귀와 요상한 로고만으로는 출처를 연상하기가 쉽지 않아 인터넷에 찾아보니 키보드 회사였다. 기계식 키보드를 구매하고 받았던 건가 본데. 세상에 제가 제일 잘 쓰던 게 키보드에 딸려온 거라니. 조금 충격이었다.
검은색 컵받침은 아직 기능이 괜찮으니 놔두기로 했는데 코르크 소재로 된 컵받침 두 개는 꽤 오래 사용했는지 많이 쭈글쭈글해지고 물을 잘 흡수하지도 못해서 이제 보내주기로 한다. 그동안 내가 수없이 적셔온 컵받침에게 감사를 표하며 안녕을 고해 본다.
얼마 전에 조명을 구매하러 들렀던 이케아에서 도톰한 코르크 소재의 컵받침을 발견했다. 테두리 부분만 올라와 있어 컵을 안정적으로 잡아줄 거 같고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처음으로 컵받침을 제 돈 주고 구매해 봤다. 괜히 얼른 사용해보고 싶어 육퇴 후 아이스 가득한 하이볼을 한 잔 타 컵받침 위에 올려둬 본다. 내 돈 주고 산 첫 컵받침, 괜히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