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이 있어도 북 레스트가 필요한 이유
우리 집에는 꽤 큰 책장이 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도서 구매를 무제한으로 지원하는 복지가 있다.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나는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국어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토지, 아리랑 같은 장편소설 마니아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은 항상 책으로 가득했다. 어릴 적 기억이기는 하지만 넓지도 않은 집 안방을 책에게 내어줬던 시절도 있다. 랙으로 된 선반이 안방에 도서관처럼 세워져 있고 그 랙에 정말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물론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어느 순간 이 랙은 온데간데 사라졌던 것 같다) 그 영향이었을까 사회 초년생으로 내가 버는 돈이 생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퇴근길엔 항상 서점을 들렀다. 아직 집에는 읽지 않은 책이 한가득인데도 매번 최소 한 권씩은 사들고 왔다.
그런 나에게 도서 무제한 지원 복지라니. 최고다.
대표님의 철학은 명확했다. 온라인 구매는 지원하지 않는다. 서점에서 수많은 책들의 파도를 유영하다가 마음에 꽂히는 책들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구매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하신 규칙이라고 한다. 핵심은 책을 직접 손으로 펼쳐보고 여는 글을 읽어보고 설렘을 느껴보라는 것. 그렇게 읽지 않은 책이 책장에 가득 쌓이더라도 시간이 한참 지난 언젠가 그 책을 다시 발견하고 읽고 싶어지는 날이 생긴다면 반은 성공이라고. 사회 초년생 때 책을 왕창 사 모으면서 절반은 읽지 못한 채로 책장에 두는 게 내내 맘에 걸렸었는데 뭔가 면죄부를 얻은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흐흐흐, 아 이 대표님은 지금 이 회사를 떠나신 지 꽤 됐다. 그럼에도 이 복지가 남아있어 정말 다행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여하튼 그래서 우리 집 책장은 책이 발 디딜 곳 없이 빼곡히 꽂혀있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책장을 바라보면 마음은 풍족하지만 가끔은 '아 저거 언제 다 읽지'하는 심리적 압박감이 다시 찾아오곤 한다. 몇 년 전 이런 나에게 딱인 제품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북 레스트'.
가끔 나는 북 레스트를 들고 책장 앞에 선다. 그리고 짧게는 이번주 길게는 이번달에 읽을 책을 천천히 고른다. 평소 관심 있는 주제가 휙휙 바뀌는 편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개를 읽고 싶은 욕심도 그득그득한 사람이라 이것도 읽고 싶고 저것도 읽고 싶다는 생각에 또 여러 권을 집어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러다 책장을 통째로 거실로 들고 나오는 게 나은가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다시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기에 또 한 권씩 덜어낸다. 그렇게 딱 북 레스트가 허용하는 공간만큼만 책을 추려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 어차피 이만큼 가져가도 다 읽지도 못하고 또 관심 주제가 바뀔 테니까 딱 이만큼만 거실로 가져가자."
그렇다. 북 레스트에 책을 추린다고 해서 이 책을 목표한 기간 내 다 읽지는 못한다. 이 중 1-2권 정도를 읽고 나면 어느새 나의 관심사는 바뀌어 있고 다시 이 북 레스트를 들고 책장 앞으로 간다. 다시 심혈을 기울여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지금은 육아 휴직 중이라 회사의 도서 구매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북 레스트와 함께하는 책장 파먹기(?) 덕분에 매일매일 책 쇼핑을 하는 기분을 느껴본다. 이미 가지고 있던 책도 새 책처럼 느껴지는 이 기분 설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