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동안 내 옆을 지켜온 아이
브런치북 소개글에도 고백했듯이 나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한 번 들이면 잘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자주 들고 다니는 작은 용품들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바로 내가 엄청난 '덜렁이'라 그렇다. 오래 사용하고 싶어도 꽤나 덜렁대고 깜빡하는 통에 버스나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건 다반사. 다시 찾으러 갈 수도 없는 여행지에서 물건을 놓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우산. 그래서 나는 우산은 절대 비싼 걸 사용하지 않는다. 어차피 또 잃어버릴 거니까. 그리고 교통카드로 쓰는 신용카드도 얼마나 자주 잃어버리는지 같은 카드를 한 달 동안 3번이나 재발급 신청을 한 적도 있다. 자동이체가 하도 끊어져 이러다 신용등급이 떨어지겠네 싶어 온라인 전용으로 쓸 카드를 만들어 절대 들고 다니지 않고 자동이체만 걸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의 매일 들고 다니면서도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은 물건이 있다. 바로 나의 버건디색 카드지갑. 심지어 비싼 지갑도 아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버건디 컬러에 끌려 매대 앞에 멈춰 섰고 가볍게 만져본 가죽의 촉감이 마음에 들어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던 아이다.
그냥 '지갑'이라 안 잃어버린 거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 지갑을 쓰기 전까지 장지갑, 반지갑, 동전지갑 내가 잃어버린 지갑만 해도 열개는 될 거다. 그래서 사실 엄밀히 따지면 덜렁이 주제에 이렇게 잃어버리기 딱 좋은 작은 사이즈에 목에 매달 줄 하나 연결할 수 없는 간결한 디자인의 카드를 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참으로 별생각 없이 이 아이를 내 손에 쥐었고 용케도 12년이나 잃어버리지도 않고 잘 쓰고 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지만 가죽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애정하는 물건이 되어갔다. 내가 넣는 카드의 양에 맞게 지갑의 형태가 잡혀갔고 가죽 색은 점점 짙어져 갔고 표면은 내가 만들어낸 각종 흠집으로 세월감을 더해갔다. 이제 이 아이는 처음 구매했을 때의 그저 그런 평범한 카드지갑이 아니다. 마치 맞춤 정장처럼 내 손에 딱 들어맞는 지갑이 되었고 고작 몇 만 원이었던 이 지갑은 어느 명품 지갑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불가한 녀석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 내 옆을 지키고 있다 보니 물건에 의인화를 다 하게 된다)
뭐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른 지갑을 구매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아무리 내 손에 딱 맞는 대체불가한 녀석이라지만 솔기가 다 터지고 안쪽 가죽이 해져 카드 지갑에 넣어둔 명함에 거뭇거뭇 가죽 찌꺼기가 묻어나버려 못 쓰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촉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죽이 너무 뻣뻣하다, 불필요하게 디자인에 군더더기가 많다 등 갖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결국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을 때까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쓴다는 게 벌써 12년. 이 아이도 나를 떠나기 싫은지 이롷게 덤벙거리는 내 옆에 잘도 붙어있는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맘에 안 들어도 결국에는 새로 샀을 텐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찍다 보니 역시나 이제는 진짜 진짜 놓아줄 때가 된 거 같은데.......
아니야 이번에도 딱 한 달만 더 내 옆에서 열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