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여동생이 연차를 내고 간병을 하는 동안 나는 병원에 들러 엄마를 뵙고 아빠의 식사와 정서지원을 위해 시골집으로 왔다.
농협 하나로에 가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 한 박스와 콩나물과 황태채, 아빠가 좋아하시는 삼겹살에 냉면, 약간의 간식거리를 샀다. 우리 사 남매는 엄마 간병을 위해 2주간 엄마간병 담당과 아빠 말벗과 식사 담당조를 짰다. 엄마가 집에 계실 때 푸짐하게 장을 보던 모습과 달리 간단하게 장을 보고 냉장고 가득 만들어 놓은 엄마의 반찬들을 알뜰하게 먹기로 했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식은 병원에 오시는 날 자주 사드리기로 했다.
가을이 오는 들녘을 지나 집에 도착했다. 고즈넉한 집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평소와 약간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분홍빛 티셔츠에 단아하게 뒤로 머리를 묶은 체 꽃무늬 일바지를 입고 집 안팎을 누비고 다니는 엄마가 만들어 내는 아늑하고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에는 언니가 아빠와 식사하고 정리하고 간 행주가 반쯤 말라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고요한 엄마의 부엌이 주인을 기다리는 듯 보인다.
마당엔 엄마가 키우는 가을천일홍과 꽃무릇, 과꽃 등이 가을볕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한 뼘 자투리땅도 그냥 두는 법이 없는 바지런한 엄마가 밭농작물이 큰 비에 쓸려간 자리마다 녹두를 심어놨다. 녹두는 노란 꽃을 피운다. 꽃 진 자리마다 가늘고 긴 녹두 꼬투리가 달린다. 엄마는 날마다 살펴보며 잘 익은 녹두를 딴다. 잘 익은 녹두는 색깔로 말한다.
"나 깜장! 깜장! “
그 소리가 들리면 나도 밭둑길을 걸어가며 새까만 녹두 꼬투리만 딴다. 수확하는 기쁨에 내가 농부가 된 마음이 된다. 평생 오롯이 부지런히 땀 흘리며 정직하게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부모님. 팔순의 연세에도 계절에 따라 수확하는 농사 벼와 콩, 마늘과 생강, 참깨와 들깨, 감자와 고구마는 늘 우리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고 정서적인 부분까지 가득 채워주었다.
추석을 앞두고 동네 산책길에 느닷없이 당한 교통사고는 자식들을 한데 모이게 했고 풍성하게 가꿔진 가을 들판을 마주하게 했다.
“아빠, 벼가 잘 익고 있네. “
“농약을 거의 안 쳤는데도 이렇게 잘 된 거 봐라.”
팔순이 넘은 아빠의 얼굴에 기쁨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벼가 익어가는 가을 논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세상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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