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친절하면 안 되겠니
외국에서 살다 보니 가끔씩 태도가 무례한 사람을 종종 만난다.
한국에 살아도 무례한 사람을 왕왕 만났다만, 외국에서 살다 보니라는 전제를 붙인 이유는 그 태도 안에 약간의 인종차별(Racism)이 묻어나는 탓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인종차별의 늪에서 고생했던 흑인들은 그 아픔을 알면 본인들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닌가 보다. 일단 아시안을 보면 태도부터 불편한 대응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감정 조절 안 되는 상황에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린다. 차마 이런 상황까지 안 가도록 만드는 것도 나의 다스림의 한 가지 미덕이다. 사실, 이런 배짱은 별로 없다. 속에서는 온갖 전쟁이 나도 나는 평화주의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싸울 때 내뿜는 나쁜 에너지가 내 기운을 낭비하는 기분이다.
월화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도록 시간을 빡빡하게 써도 모자란다. 4월까지 매주 월요일은 가장 바쁜 날이다. 1주의 시작 코칭으로 바쁘고, 오후에는 라이팅 코치 수업에 과제하고 글 쓰고 코칭하고 훈련하고 밥하고 집안일에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하루가 빡빡하다. 이번주는 한국어학과 시험기간이라 일주일 내내 시험도 있는데 한국 시간에 맞추려다 보니 시간에 쫓긴다. 어제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는데 집에서 9시 넘어 나가기 전까지 오전에 입에 물 한 모금도 못 대고 외출을 했다.
매주 화요일은 주 1회 흑인 마을에서 특별어린이프로그램을 하는 날이다. 미처 간식과 준비물 한 가지를 사지 못해서 시간에 쫓겼다. 마트 문 여는 시간이 대략 8시에서 9시 사이인데, 모임은 10시 그러니 얼마나 호닥 거렸겠는가,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말이다. 겨우 호닥거려서 산 준비물인 풀은 12개나 샀는데 하나같이 다 말라비틀어져서 쓸 수가 없어 매우 난감한 상황도 있었다. 이렇게 바쁠 때는 배고픈 것도 모르겠다. 어제저녁 6시 이후로 안 먹고 낮 1시 반까지 못 먹었으니까 19시간 공복 유지다. 살은 왜 안 빠지지.
아무튼, 그렇게 바쁘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휴대폰 통신사를 바꾸려고 알아보러 갔다. 아침도 못 먹고 점심식사 전이라 어쩌면 좀 까칠해져 있을 수도 있을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뭐 그렇게 또 예민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제 통신사 변경건으로 대리점에 갔었는데 Family day로 공휴일이라 이동 승인이 안된다고 했다. 오늘 다시 가라고 했다.
남아공에서 살게 된 이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가끔 못 알아듣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면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해야 한다.
어제 만났던 흑인 직원은 나에게 이동하는 과정에 필요한 서류를 친절히 알려줬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오늘 버럭 할뻔한 일이 있었다. 어제 일단 접수를 해놨으니 필요한 서류인 집 계약서와 신분증을 들고 다음날 아무 대리점이나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오늘 다른 대리점에 다녀왔고 문 앞에서 참 거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무슨 일로 왔냐는 여자흑인직원의 말에 내 필요를 이야기했는데 다짜고짜 port로 OTP번호를 보냈냐고 물었다. 남의 나라에서 통신사 이동을 처음 해보는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어제 공휴일이어서 신청을 못했고, 다른 지점의 직원이 오늘 아무 지점이나 가라고 해서 왔다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게 전달이 잘 안 됐나 싶어서 휴대폰 통신사 변경해 달라는 말만 3번을 했다.
그 여직원 짜증 난 말투와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어가면서 답답하다는 듯 계속 Port와 OTP번호에 대해서만 말했다. 일단 어제 받았던 OPT를 보여줬지만,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는데 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는 거다. 결국 다른 직원이 와서 다시 대응을 해줬고, 그 직원이 순서에 따른 일처리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해 준 덕에 내가 뭘 잘 못했는지 이해됐다. 어제 다른 지점에서 OPT번호를 받았고, 내가 이걸 보여주니 아저씨는 다른 PIN 번호만 확인하고 OTP는 됐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내 휴대폰으로 온 OTP넘버를 다시 그 번호로 재전송하라는 이야기를 안 해줬고 4시간이 지나 자동으로 승인 거부가 된 거다. 결국 오늘 재신청을 하고 OPT를 다시 받았다. 수분 지나지 않아 승인되었다.
그곳에서 그런 대우를 받고 서 있는 동안, 일을 보고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내가 왜 그런 대우를 받는지 아니 왜 그런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지에 대해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사실, 조금만 더 그런 태도를 지속했다면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 한마디가 불쑥 나오기 전에 일 처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뒀지만, 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왜 그런 태도로 대하는 건지, 종종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건 매우 무례한 행위라고 말해주고 싶은 순간이 꽤 된다.
마트, 은행, 비자 대행업체, 공항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도 황당하고 불쾌한 태도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그날따라 일진이 사나웠을 수도 있고, 속상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거나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향한 그 태도가 정당화되고 이해될 수는 없다.
청소년 시절 '계집애가 쌀쌀맞게'라고 말했던 엄마 말도 생각난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잔소리 같아 귓구멍을 틀어막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옛 어른들 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너도 딱 너 같은 딸 낳아서 당해봐라."
엄마가 되고 보니 내 아이도 그럴까 봐 걱정도 된다. 과거에 나도 그랬고 지금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기분은 나쁘지만 그래도 글을 쓰며 환기가 되는 부분은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하진 않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쏘아대지는 않았는지.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강남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 직원을 처음 만나 내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사람은 나한테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평소에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태도도 습관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친절도 부담스럽다.
기본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