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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May 08. 2023

어른인 나를 키우는 방법

왜? 가 아닌 어떻게?로.




지난번에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밀리에서 다운로드하여 놓고 조금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요즘에는 병렬독서 중이다. 책을 읽다가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있으면 다른 책도 받아서 조금 읽는다. 문장 독서를 하고, 렉처독서도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독서 중이다. 워낙 책이랑 가깝지 않았던 터라 최대한 나를 독서에 욱여넣는 중이다. 읽을 때는 좋은데 그 틈을 내기가 참 어렵더니 요즘음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종이책이 아닌 게 못내 아쉽지만 전자책이 갖는 최고의 장점이다.


요 며칠 잠이 푹 안 온다. 새벽에도 눈이 일찍 떠진다. 가뜩이나 카페인에도 약하면서 매일 마시는 커피 탓을 해본다. 다른 이유로는 아이들 출산과 육아 이후로는 새벽에 무조건 한 번 이상은 깬다. 정말 피곤한 날에도 덜 피곤한 날에도 푹 자 본적이 손에 꼽힌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휴대폰을 켠다. 누운 상태로 휴대폰을 켜고 SNS를 보는 게 아니라 밀리의 서재나 교보 Ebook을 켠다. 그렇게 한 줄 두 줄이라도 읽다가 다시 잔다. (책이 수면에 묘약인 건 안 비밀이다.)  




차 안에서 이동하면서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읽었다. 약 100페이지 조금 넘게 읽으면서 참 내 맘과 같은 글이 여럿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위로도 됐다. 그중에 마음에 탁 걸린 페이지가 있었는데, '아이를 대하듯 나를 대하라'는 부분이었다.


어른인 나를 키우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을 키우는 일인 만큼 들이는 노력과 정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를 키울 때처럼 고도의 집중력과 애정,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만큼 나를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김미경의 마흔 수업 - 밀리 94p


 과거 10년간 보육교사로 일했다. 교회 중, 고등부 아이들 찬양팀을 지도했고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현재는 현지에서 정식 보육교사는 아니지만, 2세부터 6세 사이의 아이들과 매주 화요일에 만난다. 토요일에는 3, 4학년 아이들과 함께 한다. 주일에는 약 80명의 4학년부터 8학년까지의 아이들을 만난다. 집에서는 삼 남매와 복닥이며 지내고 있다. 아이들과 그렇게 숱한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할 때 힘든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침묵'이다. 누군가의 침묵을 깨기란 참 쉽지 않다.

 청소년기, 나는 침묵을 잘했다. 특히 감정이 상하거나 억울한 상황이 있을 때 밖으로 쏟아내기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특히 밖에서 친구,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할 때 속상한 마음을 침묵으로 표출했다. 그럼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든 달래려고 애쓰면서 토닥였다. 그렇게 달래다 지치면 그냥 내버려 두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달래다 못해 답답해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단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려주는 일이 참 쉽지 않다는 걸 그때는 왜 입장 바꿔 생각을 못했나 싶다.

 우리 둘째를 보면서 이런 마음을 느꼈다. 가끔 글에 둘째 다엘 이야기를 쓰는데 내 아픈 손가락이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도 심하고, 입원도 자주 했다. 약하지만 참 착하고 나름 논리 정연한 녀석이다. 누나와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지만 뭐든 빠른 누나에 비하면 많이 느리고, 어리게 느껴진다.

 

 다엘이 그렇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을 잘 안 한다. 감정이 다 추스러지고 한창 시간이 지나서야 응어리졌던 마음을 푼다. 그럼 그 과정에서 달랬다가 화냈다가 답답했다가 안타까웠다가 울화가 치밀다가를 반복하며 결국에는 풀에 꺾여 시간을 가지라고 놔둔다. 이유를 알고 싶고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느끼는 좋지 않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애를 쓴다. 내가 더 애를 쓴다. 다엘의 이 반복적 패턴을 만날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아니, 청소년 시절의 나 말이다.


 아이를 대할 때 여러 감정이 섞인 태도로 반응하고 내 마음이 조급해지는 이유를 안다.  결국, 그 상황을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다. 다시는 그런 상황을 겪지 않게 만들고 싶고,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좌절감을 맛보지 않게 해주고 싶은 엄마 마음이다. 놓인 상황으로부터 건강하게 벗어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런데 결국 이건 다 내 방법이고, 내 마음이다.  침묵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데 나도 침묵하면서 아이의 침묵에는 왜 그렇게 답답했던 걸까,

 

 위의 책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아이를 달랠 때 나를 위해 달랬는지, 아이를 위해 달랬는지를 생각해보겠됐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나에게 채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보았다. 얼마나 나에게 질문했는지, 어떻게 질문했는지 말이다.  


"대체 넌 왜 그러니?"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니?"

"그건 좋은 게 아니야."

"거기에서 그냥 이제 좀 떨치고 일어날래?"

"됐어 그만하면 됐잖아."


나에게 던진 말도 참다못해 결국 아이에게 던진 모진 말도 채찍질하고 자책하는 말이었다.

늘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뛰어나오는 말은 "왜 그래?" 다.

이유는 분명 있지만, 왜?라는 질문 앞에서는 말문이 탁 막힌다.

나처럼 다엘도 왜?라는 질문에 입 다물고 싶지 않았을까,


뭘 왜야. 이유는 있지만 말하기 싫은데.




우리의 뇌는 '왜'라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라는 질문에 반응한다. 처한 상황에서 '왜'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뇌는 그 '어떻게'를 명령으로 받아들여 방법을 모색한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를 대하더라도 추궁하는 게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그 상황과 감정으로부터 나올 수 있게 질문을 해줘야 하는 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법이 각광을 받는 거란 생각이다.

 

뭐 교육적인 측면이야 여러 학자들의 가설과 논문이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그저 나는 들었던 내용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느낀 것들을 조합시켜 이야기해 본다.


어른인 나를 키우든 아이를 키우든 돌봐주는 방법은 같아야 한다.

늘 민감할 필요도 없다. 가끔은 무심하지만 좀 더 부드럽게, 좀 더 세심하게,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는 왜?로 추궁하는 게 아닌 어떻게?로 상황과 자신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지금 막내 요엘이 묻는다.


" 엄마! 이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대답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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