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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May 29. 2023

상대적 행복의 척도

(feat.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주일이다. 매주 일요일은 흑인빈민촌의 사역교회로 간다. 오늘도 많은 아이를 만나고 하루를 보냈다. 매 주일마다 간식받으러 오는 건지, 찬양이 아닌 노래와 춤이 좋아 오는 건지, 그저 사람이 많아 북적거리는 기분이 좋아 오는 건지, 진짜 믿음을 가지고 예배 들어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에게 왜 오는지 물으면 딱히 정확한 대답은 없다. 


매주 예배가 끝나면 간식을 양손에 쥐어 준다. 한 손엔 과일, 한 손엔 과자 하나를 쥐고 집으로 간다. 바로 그 자리에서 간식을 먹고 때로는 더 받고 싶어서 서성이기도 한다. 더 달라고 하는 아이도 있다. 비양심적으로 주머니에 이미 받은 간식을 숨기거나 줄 제일 뒤로 가서 못 받은 척 또 받는 아이도 있다. 반면, 안 받은 줄 알고 주려고 하면 이미 받았다며 주머니에 넣은 간식을 보여준다. 그런 아이를 보면 한 개 더 주고 싶다. 너는 정직했으니까 한 개 더.

 

남아공에 와서 참 진귀한 광경을 많이 본다.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애가 애를 업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이제 막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동생을 업고 다닌다. 혹은 더 어린 젖병을 물리는 아기를 안고 업고 다닌다. 자는 채로 안고 오고, 우는 아이를 엄마가 어르듯 안고 어른다. 얼마나 야무지게 들춰 업었는지, 그 작은 몸통 골반을 한쪽을 치켜올린 채, 말 그대로 '얹힌' 상태로 메고 다니기도 한다. 아이가 아이를. 

    


티브이 다큐에서나 보던 모습을 매주 본다. 안타깝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다자녀인 가족은 형, 오빠가 동생을, 누나 언니가 동생을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다. 우리 집도 다르지 않다. 첫째와 셋째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나니, 첫째가 셋째 키우는 걸 많이 도와줬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끈끈할까 싶다. 

몇 달 전 약 60세 가까이 된 교인분이 오빠의 장례로 인한 큰 슬픔을 보였다. 솔직히 나이는 잘 모르겠다. 특히 흑인은 나이 가늠이 잘 안 된다. 나보다 열 살은 많겠지 싶었던 사람이 20대였고, 70대는 되어 보이는 사람이 50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당연히 성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고등학생이었다. 아무튼, 그런 장례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허전하고 슬플지 가늠이 안 됐다. 일의 경위를 이야기하며 오빠가 누웠던 방 한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 애처로워 보였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위태위태하면서도 어렸을 때 이렇게 끈끈하게 자랐다면 이별을 맞았을 때의 상실감은 무척 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무척 오래전에 봤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장면이 오버랩됐다. 언제 봤는지도 기억도 안 나지만,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부분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차 안에서 이동하는 시간에도 독서를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전에는 속이 울렁거려서 못 봤는데 운전은 남편에게 맡기고 보조석에 앉아 휴대폰으로 책을 읽는다. 그 시간마저 소중하다. 조수석에 앉아 쫑알거려야 하는데 침묵할 수밖에 없어 남편에겐 미안하다. 가끔 이야기도 한다. 


책 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 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에서, 80p>

아우슈비츠에서 좀 더 환경이 나은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옮겨간 후에 적은 내용이다. '기쁨의 춤 잔치'라고 설명할 만큼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사실에 농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니, 씁쓸했다. 그러면서 이건 행운이고, 그 외에도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운 척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두 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한 손에 과자를 쥐고 한 손은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누나에게 오렌지를 내밀었다. 누나는 잘 까지지도 않는 그 두꺼운 오렌지 껍질을 기어이 벗겨냈다. 걸어가다 그 모습을 보고 시선을 멈췄다. 듬성듬성 껍질을 파먹듯 뜯어냈다. 그리고 알맹이만 잘 나오게 벗겨 동생 손에 쥐어줬다. 동그란 오렌지 알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한입에 그냥 베어 물려고 했다. 누나는 그 오렌지를 뺏어 반으로 갈랐다. 순간, '아, 나눠 먹으려나 보다. 자기 건 어디 있지? 하긴 먹고 싶겠지, '  생각했다. 그런데 누나는 오렌지를 반으로 갈라 동생 손에 다시 쥐어 주고 나를 한번 보곤 씩 웃고 친구에게 갔다. 남자 꼬맹이는 작은 손으로 겨우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붙들고 있었다. 과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렌지를 들고 먹으려는 찰나, 다시 누나가 왔다. 이번에는 오렌지 알을 하나씩 먹기 좋게 끝만 붙어 있게끔 가르기 시작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입에 하나 넣으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는 사이 다시 가른 채로 동생에게 쥐어주고 다시 사라졌다. 내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다정하고 착한 누나였다. 하나 더 먹고 싶을 만도 했는데 말이다. 옆에 서있는 나에게도 오렌지 냄새는 무척이나 새콤달콤하게 느껴졌다.  


상대적 행복 척도

남자아이는 입에 오렌지 알맹이를 가득 넣고 빵빵해진 볼로 오물오물 씹었다. 

행복은 순간이다. 매일이 아니어도 그 순간이나마 즐길 수 있는 행복.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기준은 모호하지만 일반적으로 누릴 수 없는 삶은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다. 행복은 부와 상관없다. 물론 돈도 환경도 더 나을수록 삶의 질은 나아진다. 사람의 욕심도 같이 늘어난다. 얼마큼 더 가지고 덜 가졌는지로 행복을 정의할 수는 없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온 이야기는 극한의 상황이고 인간의 모든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 안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주어진 환경에 대해 극한 감사를 느낄 수 있었던 거다. 


내 삶도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남아공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속도에 상관없이 감사했다. 그다음엔 좀 더 빨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아공도 인터넷 속도가 발달하며 꽤 빨라졌다. 3G에서 LTE로 4G로 이제는 5G도 잡힌다. 돈을 쓸수록 더 빠른 인터넷을 쓸 수 있다. 4G만 돼도 감지덕지다. 이제는 3G나 LTE 잡히면 성질이 버럭 난다.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거나 인터넷이 열려도 안 터지는 경우가 생긴다. 남아공에서 전기 안 끊기도 수도가 잘 나오는 거만 해도 감사가 넘쳤다. 하루 2시간 나가던 전기는 이제 하루 한 번에 4시간도 나간다. 하루 종일 나가는 시간을 합하면 10시간도 된다. 하루 2시간 나갈 때는 무슨 전기가 2시간씩 나가냐며 투덜거렸는데, 이제는 제발 하루 2시간만 나가도 감사하겠다고 한다. 


행복의 척도는 뭐가 더 있어서도 아니고, 덜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감사하는 정도로 달라진다. 

책을 읽고 삶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책  읽는 순간이 좋고 평범하지 않은 환경을 볼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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