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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Sep 12. 2023

끄적끄적 이 가진 힘

메모는 오랜 기억도 상기시킨다.



"엄마이름은 아니? 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매주 토요일 모이는 한글학교에서였다. 고등반 수업에서 선생님과 반 학생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에이, 엄마 아빠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왜? 모를 수도 있지! 너네 집에서 엄마 아빠 이름 안 부르잖아. 엄마~ 아빠~ 이렇게 부르지 않냐?"

"오, 일리가 있네. 그렇게 생각하면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친증조 할아버지 성함이 기억이 안 나서 기억 중인데, 저 반에서는 엄마 이름을 모르는 애가 있는 건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웃음소리에 같이 섞여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존함을 모르는 건 문제가 안되는데, 엄마 아빠 이름 모르면 문제가 되겠는 걸?"


혼자 중얼거리면서 우리 반 아이들을 챙겼다. 보통은 미아 방지 차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름과 연락처, 주소를 외우라고 교육을 시킨다. 그러면서도 일상을 살면서는 아이들이 부모의 이름을 부를 일이 없지 않나. 가끔 엉뚱하게 '최주선 엄마!' 하면서 불렀던 꼬맹이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뮤지컬 배우 김소현이 남편 손준호가 이름을 불러 설레하자 3살 주안이가  아빠처럼 엄마 이름을 불러주며 "소현 씨!"라고 부르니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영상이 이 기억난다.




한글학교에서 추석 전에 계기교육을 진행했다. 초등 4학년 이상부터 고학년 대상으로 진행된 패밀리트리를 만들기 위해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이름을 조사해 오기로 했다. 우리 집 별, 다엘 역시 5학년 6학년이라 조사 대상이 되었다. 미리 전날 아이들과 패밀리 트리를 그려보면서 나의 부모님 성함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의 성함까지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 입장에서 설명하려고 하니까 왜인지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나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성함은 똑똑히 기억나고, 친할머니 성함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친할아버지 성함이 떠오르질 않았다. 아빠도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 나도 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 딱 한 번 뵌 적 있는데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아빠의 아버지이시고, 나의 친할아버지시니까 아빠는 이름은 알아둬야 한다며 명절 때 한 두 번 언급해주시곤 했다. 그렇게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할아버지 성함이었다. 한국은 새벽 시간이라 전화도 못하겠고,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해 볼 뿐이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최 OO'이라고 적으라며 칸을 메워주었다. 아침에 한글학교 출근 날이 되어 아이들과 차를 타고 가면서 은별이에게 할아버지한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도 생각이 나지 않아 나만 답답했다. 일하는 중인지 송신벨만 하염없이 울렸다. 결국, 전화통화를 못한 채로 한글학교에 갔고, 쉬는 시간에 나를 찾아온 다엘, 별은 어젯밤 알려준 대로 할아버지 성함란은 '최 OO'으로 채웠다.


집에 돌아와 점심으로 김치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설거지를 하던 중 갑자기 이틀을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던 이름이 떠올랐다.


"어? 최 자 대 자 수 자였던 거 같아!! 최대수!!! 맞는 거 같아!"


그 말을 할 때 이미 아이들과 친정아빠가 통화 중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름 세 글자가 정확히 맞았다.


"오! 엄마 맞췄어요. 오!"


가족들이 맞다고 하니까 또 내 기억력 좋다며 어깨 뽕이 상승했다. 기억하면 좋지만 잊어버려도 큰일 나지는 않는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존함이었다. 내가 하루 종일 그 이름을 기억하려고 생각할 때 떠올렸던 건 친정아빠의 목소리와 그때의 상황이었다. 몇 살인지도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나에게 할아버지 존함을 알려주신다며 한자로 할아버지 이름을 쓰고 한글로 옆에 적어 주었었다. 그리고 아빠 목소리로 또렷하게 "최 자 대 자 수 자"라고 말했었다. 한 번은 아니었다. 기억으론 두세 번 정도였던 것 같다.  참 신기하다. 사람의 기억 소환 능력은 생각하려고 애쓰면 떠오른다. 그게 어떤 상황과 환경, 정취나 풍경까지 떠올리면 생각보다 쉽게 상기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수련회 때마다 적었던 롤링페이퍼의 글귀가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는 거겠지만, 글로 적어 놓은 기록이 훨씬 오래간다. 아빠가 그냥 말로만 이야기해 줬다면 기억을 못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글을 쓸 때는 과거의 일을 기록한다. 과거의 일을 쓸 때는 잠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세세하게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당시 했던 말, 입었던 옷, 상황, 주변 풍경, 기분, 느낌까지 천천히 상기시켜 본다. 대부분의 기억이 100%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얼추 기억과 생각을 조합해 글에 기록하곤 한다. 기억은 조작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방향설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기억에 남은 부분까지만 기록한다. 한두 번의 끄적거림과 글이 만나면 과거를 기억해 내도록 하는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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