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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Aug 05. 2021

소음도 인종차별이야?

외국인 세입자는 숨죽여 살란 말인가.




우리 콤플렉스는 40가구가 산다. 

지금 사는 남아공 집에 처음 왔을 때, 바로 뒷집에는 인도 부부가 살고 있었다.  우리가 1번 집, 바로 옆 2번 집은 한국 가족, 건너편에는 25번 집 백인 가족,  뒷집은 3번 집 인도 부부이다. 구조상 집 거실문에서 약 30m 담벼락 하나로 뒷집과 연결이 된다. 우리 집 안에서 거실문을 열어놓고 큰 소리를 내면 3번 집에 소리가 들리고, 3번 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우리 집까지 크게 들린다. 남아공 대부분 집은 한국의 집처럼 방음벽을 설치하지 않고, 창문도 2 중창이 아니다. 옆집과의 거리상으로 가까우므로 방음에 약하다. 남아공의 주택 법은 낮부터 해가 지기 전 6시까지는 주변 집에서 나는 소음에 자유롭다. 하지만, 저녁 6시 이후에는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단,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동안에는 손님도 많이 찾아오고 남아공식 바비큐 파티인 브라이(Braai)도 하므로 시끄러운 집이 더러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토요일 낮이었다. 방학이기도 했고, 더운 여름 날씨에 간이 수영장을 정원에 펴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셋째 요엘이가 20개월 무렵이었고,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흥분하면 높은 톤의 비명을 지르곤 했다. 어른도 차가운 물을 몸에 대면 절로 소리를 지르게 되지 않던가, 아이들은 신나게 한낮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Hello. your child is screaming. Please Don’t scream. “     


남자는 아이가 소리를 지른다며 못 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순간 낯 뜨거워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아이들을 얼른 수건으로 닦이고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생각해 보니, 오래 소리 지른 것도 아니었고, 토요일 낮이었으며, 아이들의 방학 기간이었다. 아이의 비명에 걱정이 되어서 왔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기에 조용히 정리하고 들어왔다. 몇 주 후, 아이들은 집 정원에서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약간씩 소리가 커질 듯하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그때, 남편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콤플렉스를 대표하는 케어테어커 백인 할머니였다. 케어테어커(caretaker)는 한국의 동네 통장 개념이다. 할머니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엄하고 아이들을 싫어하는 백인 할머니이다. 한 번은 집 문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다가 들어가서 하라며 주의를 받았다. 차가 들락거리는 길이니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여튼, 할머니의 문자는 3번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고 조용히 해달라는 문자였다. 순간 기분도 나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담벼락 하나로 직접 이야기하면 될 것을 왜 케어테어커에게 연락을 했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지난번 한번 와서 직접 이야기했는데 그 뒤로 조용히 안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입자고, 그 사람은 집을 매입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인종차별을 받는 기분이 들었고, 돈 없어서 월세 산다고 무시받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아이들에게 윽박지르는 일이 자주 생겼다.      


”조용히 해! 큰 소리 내지 마, 작게 얘기 해. “      


아이 셋이 놀다 기분이 좋아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에게 자주 주의를 시키게 되었다. 집에 있는 작은 정원에 발을 딛고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날 때면 조용히 하라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손가락으로 경고했다. 우리 공간에서 마음대로 생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스트레스였다. 더운 여름에는 거실 창문도 꼭꼭 닫아 놓고 지냈다. 너무 답답해 문을 열었을 때면 3번 집 문이 닫혔다. 그렇게 최대한 소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어테어커 할머니로부터 또 한 통의 긴 문자가 날아왔다. 우리가 그 뒤로 조용히 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소음 낸다는 3번 집의 항의 문자였다. 케어테어커 할머니는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야단쳐서라도 듣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자기 손주는 말을 안 들어서 닭장에 가둔 적도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웃고 울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너무 큰 소음이라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해야겠지만, 그 당시 우리 아이들은 매우 어수선하게 노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막내가 어렸고 막무가내인 시기이긴 했지만, 누가 보아도 아이들이 참 얌전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몇 번씩 거듭되는 항의 문자에 도저히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알아보았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콤플렉스 안을 길을 따라서 아이들을 데리고 걷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껄끄러웠다.      

몇 개월이 지나서 보니, 그 집 빨랫줄에 분홍색 신생아 옷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저 집 아기 없지 않아? 강아지 옷인가? 아기 옷 같은데? “      


며칠 지나 신생아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 임신 중이었나 봐~ 그래서 그때 민감했었나? “      


우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기억을 가지고 이사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신생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담을 넘을 때마다 그러려니 했다. 아기는 원래 울어야 건강한 거니까, 

그러다 몇 달 후, 또다시 케어테어커 할머니에게서부터 문자가 왔다. 여전히 우리가 시끄럽다며 말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남아공 주택법을 찾았고, 계속 항의하면 우리도 아이가 우는 소리에 대해서 항의할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 항의한 적 없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후론 다시는 항의가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도 계속해서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해왔었다. 당장 이사할 집도 마땅치 않고, 이사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3번 집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문밖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고, 종종 아빠의 호통치는 목소리와 엄마의 날카로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아이를 처음 키워봐서 잘 모르나 봐, 힘들긴 하겠다. “      


그래도 아이 셋을 키워 본 남편과 나는 웃음으로 단락 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돌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1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남편에게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3번 집 스미다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당신의 집에서 들렸던 소음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없었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아이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예상치 못한 문자였다. 문자를 받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문자 보내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해합니다. 원래 아이들은 울면서 자랍니다. 그게 건강하니까요. 아이가 울 때 문을 열어두어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      


이 문자로 좀 더 마음이 편해졌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이사에 대한 부담도 내려놓았다. 이 에피소드는 남아공이어서 겪은 곤란했던 일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생각과 경험, 이해가 달라서 생긴 문제였다. 남아공의 다른 콤플렉스는 아이들이 나와서 놀기도 하고, 이웃 간에 서로 왕래하는 곳도 있다. 우리가 사는 콤플렉스는 그중에 조용한 편에 속해서 다들 집안에서 주로 생활한다. 그 탓에 이웃에 누가 사는지 일부러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다.      

25번 집에 백인 가정이 산다고 했었는데, 이런 일이 있던 중에 그 집이 이사하고 남자아이만 2명인 젊은 백인 가정이 이사를 왔다.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엄청난 소음이 매일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활력이 넘쳐서 조용한 날이 있으면 어디 갔나 싶을 정도다. 케어테어커 할머니는 그 집 아이들에게는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 집과 2번 집에 사는 한국 가족에게는 수시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시켰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산책할 때면 뛰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콤플렉스 규칙이 그런가 보다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그 백인 할머니도 은연중에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백인과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한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가끔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억울함을 느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때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항상 한국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며 우리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인종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이 달라서 문화적으로 많이 다른 것들을 경험하면서 타지에서 살아남기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3번 집과의 반복되었던 일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늦게나마 이해받고 이해할 수 있어서 감사한 경험이었다.  뒤늦게 받은 문자로 인해 ‘인도 사람은 원래 까다롭다.’라고 말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들은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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