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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Aug 16. 2021

희생양 삼은 둘째.

아들아 미안하다.



"엘아, 이거 오늘 안사면 서운할 거 같아?" 


첫째 별이 옷이 죄다 작아졌다. 매일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초딩은 아주 가끔 civves day(civilian clothes, as opposed to uniform)로 지정된 사복 입는 날이 있다. 


* civves= "the Chief Constable came along in civvies"


지난 금요일 별이는 Woman's day를 맞이해 여자아이들만 civves가 허락되었다고 했다. 이 옷 저 옷 다 끄집어내 펼쳐 봐도 부쩍 자란 탓에 맞는 옷이 별로 없었다. 평소 교복을 입었고, 코로나로 외출할 일 조차 확연히 줄어든 요즘이기에 몇 번 입지도 못하고 작아진 옷들 투성이었다. 현지 한인 가족에게 작아진 옷이며, 산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작아진 구두와 샌들 모두 전달했다. 입을 옷 하나 없다고 입이 댓 발 나온 별이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 생겼다. 


"내일 가자. 옷 사줄게."


가능하면 있는 것들로 활용하고, 추가적인 지출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아이들 옷 신발만큼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내 거면 모를까...... 

원피스 하나, 티셔츠 하나, 긴 바지 하나 총 3벌을 골랐다. 눈치 없는 막내는 스파이더맨 빨간 반팔 후드티를 집어 들고 와서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 몰라 아빠한테 물어봐. 오늘은 누나 꺼 사러 왔는데, 집에 옷 많은데 담에 사면 안될까?" 


물려받은 옷이 이미 많은 막내는 옷이 쌓였다. 단지 스파이더맨 옷이 없을 뿐.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6세 막내아들의 애교에 아빠는 이미 넘어갔다. 둘째가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남편은 둘째 후드티도 골라보라며 하나 쥐어줬다. 별이 옷이 맞는지 라커룸에서 입어보던 사이 일어난 일이다. 별이 3벌 사주면서 둘째, 셋째 1개씩 사주는 게 뭐 문제겠느냐만은, 예상 없던 하루 지출에 걱정이 앞섰다. 몇 푼 조금 더 쓴다고 집안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경제적 부담을 가득 안은 부모로서 이럴 때 참 난감하다. 



결국 둘째 엘리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아니요. 안 서운해요." 


뒤돌아서는 아이 모습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실수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목구멍으로 침이 잘 삼켜지지 않았다. 


"아니, 집에 이거랑 똑같은 티셔츠가 있어서... 회색 후드티 옆집 형한테 물려받은 거 있거든." 


없어서 사려던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이미 엎질러진 물에 더 에둘러봤자 분위기만 이상해지고, 마음만 상할 뿐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축 처진 어깨로 바닥에 신발을 질질 끌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엘이를 보자니 미안함은 곱빼기가 됐다. 남편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눈총을 쐈다. 


"아니, 이왕 살 거면 집에 없는 거 사야지! 엘아, 이리 와봐 다른 색깔이나 다른 모양 보자."


이미 마음이 상해 시선도 맞추지도 못한 채 입을 삐쭉거린다. 이렇게 될 거 기분 좋게 사라고 할걸, 어미가 못났다.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마트에서도, 장난감 가게에서도 엄마 아빠 돈 없어질까 봐 2~3번은 참는 둘째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도 많고, 병원 입원도 수차례, 돋보기안경까지 쓴 이 녀석은 셋 중에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다. 하고 싶은 건 하고 마는 첫째, 셋째에 반해, 엄마 아빠 주머니 사정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둘째가 그럴 때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해. " 


매번 말은 이렇게 해놓고, 이미 엘리가 어떤 마음일지 알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둘째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몹쓸 엄마,

집에 와서 사온 옷들을 전부 빨래 통에 넣고 다음날 아침 세탁기를 돌렸다. 웬일인지, 빨리 빨래를 돌리라는 막내, 빨래 걷을 때 평소보다 더 적극적인 둘째를 보니 아이는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십 년 살아온 둘째 인생을 내가 너무 크게 봤나 보다. 속이 깊은 아이에게 내가 더 상처를 줬다.




주일 아침이 되어 세 녀석 모두 새로 산 옷을 입고, 예배 준비를 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끔한 아이들 모습에 미안함이 더 밀려왔다. 하루 7번씩 옷을 휙휙 집어던지며 갈아입어서 카멜레온 같았다던 나 때문에 엄마는 옷 정리하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옷에 대해서 유난을 부려도 이상할 게 없다. 딸 별이와 막내아들은 그런 나를 닮았고, 둘째 엘이는 은근하게 티가 안나는 아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쓰던 물건이랑 비슷한 물건이어도 새 물건이 들어오면 당장 뜯어보고 싶은 심리는 같지 않을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도 가장 점잖은 아이는 늘 손이 덜 갔다. 속 깊은 아이는 은근히 잘 참는 아이로 치부하기도 했다. 오히려 말썽 피우고, 힘들게 하는 아이는 돌보기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더 관심을 가졌고, 조용한 아이는 손이 안 간다며 좋아하기도 했었다. 교사로 지낸 세월을 지나 직접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남달라 진다. 시선 또한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시행착오도 겪고,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나 말도 하면서 다시금 나를 들여다본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때로는 나보다 나은 아이들을 보면서 반성한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다. 잠시 내게 맡기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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