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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Sep 13. 2021

아홉수의 정신머리

냄비 다 태워 먹고 내 속도 탄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거실 식탁 겸 내 전용석에 앉아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면서 집중을 했다. 

그림 하나 완성시켜보겠다고, 열심히 열중을 하고 있던 그 시각, 주방에서는 이상한 냄새와 더불어 매캐한 연기가 뿜 뿜 삐져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냄비 다 태워먹었다. 

절반쯤 남았던 감잣국 속의 두부와 감자는 바닥에 눌어붙었고 감자인지 두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버렸다. 내일 아침 먹으려고 데워둔다며 잠깐 돌려놓은 전기스토브 레버를 깜빡 잊었다. 만두랑 떡만 넣어서 끓여 아침 해결하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국을 새로 끓이게 생겼다. 


"몰랐어? 난 당신이 뭐 또 오래 끓여야 되는 거 놔두나 보다 했지!" 


말 좀 해주지. 알면서 놔뒀다는데 내 잘못을 애꿎은 남편에게 괘씸죄를 뒤집어 씌울 수도 없고, 아무튼 냄비가 타들어가는 동안 문도 없는 주방과 거실 벽 하나를 두고도 냄새도 못 맡았다는 건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머리 한대 더 쥐어박고 싶은 건 요즘 자주 그런다는 거다. 내 나이 마흔을 코 앞에 두고, 요즘 같이 깜빡깜빡했던 일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꼭 주방에 올려놓은 냄비만 깜빡한다. 벌써 네다섯 번은 된 것 같다. 아, 치매는 아니겠지. 건망증도 아니겠지. 아니어야지 이제 겨우 마흔인데! 




"그거 알아요? 29에서 30 넘어갈 때 이상하게 몸이 아프고, 39에서 40넘어갈때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니까요. 49에서 50 넘어갈 때도 점점 더 면역도 약해지고 몸이 나이 드는 티가 나요." 


얼마 전에 이웃과의 대화 중에 당신도 아홉수 나이 때마다 힘들었다면서 올해 초부터 급격히 저질체력이 되고 자꾸 깜빡깜빡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한 게 아홉수 탓이라고 나를 토닥였다. 코로나 탓도 있겠다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왜인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홉 수도 아닌 남편도 올해 들어 유난히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코로나가 여러 차례 다녀갔나 싶기도 한 마음도 솔직한 마음이다. 


스무 살까지 살면 죽는 줄 알았다. (나 어린 시절 그 당시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영화가 내 뇌리에 매우 깊게 남았었다.) 스무 살이 되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건강하고 재기 발랄하게 살았다. 마음은 늘 스무 살에 멈춰있는 것 같은데 대각선에 삼각모양으로 세워진 검은 아이패드 화면에 비친 나는 이미 40대 아줌마다. 나이 먹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건데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뿐인 듯. 




그림 하나 멋지게 그려놓고, 냄비 하나 태우고 나니 그동안 잠시 버려뒀던 이 공간을 살릴 수 있는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모든 위기는 다 글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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