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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Dec 16. 2023

만족할 수 없는 냄비밥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의 발견  




남아공 롯지(펜션)에는 식기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미료를 비롯한 몇 가지 식기구를 챙겨야 한다. 국 먹는 문화도 아니라 밥그릇, 국그릇도 없어서 필요하면 챙겨야 한다. 물론 오목한 접시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영 성에 안 차고 불편하다. 젓가락은 당연히 없고, 전기압력밥솥을 쓰는 식문화가 아니기에 당연히 롯지에 밥솥도 없다. 그렇다고 햇반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결국 밥솥도 필수다.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밥을 막 갓 지어서 냉동실에 소분해서 얼린 후 가져가면 된다. 

그 탓에 필요한 거 깜빡하면 주변에서 살 곳이 없다. 특히 한국 음식 조미료나 쌀 깜빡하면 그냥 포기해야 한다. 어딜 가든 캠핑 장비 기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캠핑 장비 하나 제대로 없어 주섬주섬 블록 모으듯 모아가지만 한 서너 번 다녀보니 대충 감이 온다. 이번에도 잘 챙겨간다고 갔는데 이미 고속도로에 올라탄 차 안에서 하나 둘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헉, 타월!"

"괜찮아 거기 있어." 

"긴팔!" 

"비 오면 그냥 좀 춥지 뭐." 

"라이터!" (전기스토브라 바비큐 하려면 필요하다) 

"헉 어뜨카지?" 


이것만 봐도 하나 둘 튀어나온다. 놓고 온 물건이 충전기나 수영복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짐을 풀고 저녁밥을 먹으려고 쌀을 씻어서 밥을 안쳤다. 이미 물에서 신나게 놀고 난 아이들이 주린배를 쥐고 빨리 밥 달라고 성화다. 남아공에서는 물을 쓸 때마다 한국의 아리수가 몹시 그립다. 물에 석회도 많고 물에서 냄새가 난다. 철 냄새라고 해야 할까, 가끔 그런 냄새가 나는 데 집에서야 정수해서 먹지만 여행지에서는 그런 게 없다. 마시는 물을 사서 먹으면 된다. 그래도 설거지할 때마다 올라오는 철 냄새가 왜인지 모르게 찝찝하다. 이렇게 느껴질 때면 어쩔 도리 없이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암튼, 가져간 밥솥에 밥을 안치고 30분 동안 기다렸다. 볶음밥을 해 먹으려던 참이었다. 저녁 상을 차리려고 밥솥을 열려고 다가가자 밥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바람 새는 소리랄까, 뚜껑을 열고 밥이 잘 되었으려니 짠! 하고 열었는데, 맙소사 밥알이 그대로다. 


엥? 밥이 왜 안 됐지? 밥솥이 고장 났나?

 

신혼 때부터 쓰던 밥솥이다. 13년이나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여태 밥 맛은 좀 떨어졌지만 잘 작동했다. 올 초에 한국 다녀올 때 새언니가 밥솥을 새로 사줘서 집에서는 새 밥솥을 쓰고 있다. 신혼 때부터 쓰던 밥솥은 빼서 창고에 두었다가 꺼내온 거다. 창고 보관이 잘 못 되었을까, 알알이 살아있는 쌀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밥솥 내부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오른쪽 왼쪽 위, 아래를 샅샅이 훑어봤다. 

세상에, 고무패킹이 없다. 맙소사, 고무패킹이 없다니! 

불현듯 지난번 밥솥 바꾼다고 오래된 패킹을 빼놓은 생각이 났다. 미리 뚜껑까지 열어보고 밥솥 상태를 확인하고 가져왔는데, 고무패킹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보지도 않은 거다. 이제 와서 밥을 살 수 있는 곳도 없고, 여행 첫날인데 남은 날 동안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아공에서 살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공법이 나올 때다. 바로 '이 없으면 잇몸' 공법이다. 냄비를 꺼내 물에 헹군 후, 밥솥의 살아있는 쌀알을 다 부었다. 그리고 냄비 밥을 하기 시작했다. 캠핑 가서 냄비밥 많이들 해 먹는데 뭐 어려우랴, 이전에 한두 번 해본 경험도 있고 그냥 하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밥을 했다. 결과는 약간 질펀하지만 나름대로 씹어 먹을 수 있는 밥이 됐다. 식탁에 올려놨는데, 아이들 불만이 터져 나온다. 



"엄마, 밥 맛이 왜 이래요? 이상해요."

"어 이상한 냄새도 나는 거 같아."


어떻게 먹냐는 듯한 말을 듣고, 밥을 먹어봤다. 밥도 생각보다 잘 됐고, (아래는 좀 눌었지만) 먹을만했는데  뭔가가 이상하긴 했다. 말로 설명하기는 애매자지만, 갓 지은 밥에서 나는 고소한 맛이 전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김, 김치와 준비해 간 반찬 몇 개랑 밥을 먹고, 결국 막내 요엘은 계란밥으로 만들어 비벼줬다. 그러고도 싹싹 비우지 않은 밥그릇을 보면서 더 말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부족한 허기를 컵라면으로 달랬다. 


남아공 쌀은 다 흩어진다. 재스민 쌀(롱 그레인- 길쭉한 쌀)의 경우 찰기가 없어서 밥을 하면 다 흩어진다. 그 탓에 중국 식료품점에서 베트남산이나 호주산 초밥 라이스를 사서 먹는다. 가격 대비 베트남쌀이 제일 싸면서도 무난하게 먹기가 좋다. 묵은쌀을 파는 경우에는 같은 쌀을 사도 맛이 유난히 떨어진다. 찰기가 부족하니까 물을 많이 잡고 찹쌀을 따로 사서 섞어 먹는다. 한국처럼 찰지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렇게 감사한다고 말은 하지만, 늘 한국 쌀 먹는 것처럼 맛있지가 않아서 아이들도 밥을 맛있게 잘 안 먹는다. 가끔 찰지게 잘 지어진 날에는 밥을 두 그릇, 세 그릇도 먹는다. 한국쌀이나 미국쌀은 찰기가 좀 더 있는데 쌀 25kg에 한화로 8만 원씩 하는 쌀은 도저히 사 먹을 수가 없다. 5~6만 원 쌀에서 만족한다. 


이쯤 되니, 집에서 해 먹던 밥도 그다지 맛있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만족되지 않는 냄비밥을 먹고 있노라니 집 밥이 그리웠다. 내 손때 묻지 않은 살림살이로 서걱서걱 음식을 만들면서 집에서 부엌칼을 가져왔어야 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심지어 수박을 썰면서는 내 온몸의 체중을 실어서 눌러대고 잘 잘리지 않고 수박이 빙글 돌았다. 

평범한 일상, 익숙한 내 삶에 대한 감사 절로 나왔다.  최상급 아니, 상급도  아닌 중급 쌀을 먹으면서 만족하지 못했던 마음은 저리 가고 밥솥이라도 잘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깊었다. 익숙한 맛에서 벗어난다는 것, 익숙한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잠시 멈추게 만든다. 


일탈이라 좋았다. 여행이라 좋았다. 그러나 그만큼 감수해야 할 부분들도 있었다. 이런 경험들 모두 내게는 글감이라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 덕분에 글을 한 편을 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가 된다. 


아쉽지만, 준비해 간 삼각김밥 재료로 로 냄비밥 삼각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생각보다는 괜찮았지만,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맛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첫끼는 전기밥솥에  갓 지은 밥으로 삼각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삼각 김밥 중에 제일 맛있었다. 최악의 직전 경험이 그다음에 올 경험의 만족도를 높여줬다. 그렇게 늘 상대적이지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게 삶인가 보다. 

이미 먹은지 4시간은 지난 지금까지 먹었던 삼각김밥 중 가장 맛있었던 맛을 음미하며 오늘 글을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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