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산에 가면 운동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난다. 숨을 헐떡이며 뛰는 사람, 빠른 속도로 걷는 사람,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면서 걷는 사람, 아이 목마를 태우고 걷는 아빠, 엄마 손 잡고 걷는 아이, 친구들과 떼로 몰려 하이킹하는 젊은 무리, 천천히 걷지만 매우 탄탄해 보이는 노부부(이곳 아프리칸스인 백인은 나이가 들어도 체력이 엄청 좋아 보인다)까지. 물론 다 스치는 사람들이다. 가끔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걸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적은 일이다.
길을 걷다가 마주치면 "헬로" 인사한다. 100미터 거리부터 걸어오는 게 보이면 이미 속으로 인사할 준비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까이 왔을 때 자동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헬로 하와유?"라고 말한다. 남아공 처음 왔을 때 그게 그렇게 어색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상대보다 먼저 손을 들고 "헬로" 혹은 "굿모닝, 모닝"이라고 말하는 나를 본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지 의식하고 나니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면서도 익숙해진 삶에 곰곰이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문득, 내가 한국에서 살 때는 수많은 사람과 스쳐도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봤다. 없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아니거나, 음식점, 카페, 상점 안으로 목적이 있어서 들어가서 나누는 인사 말고는 길에서 스치는 사람들과는 인사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인사하거나 아는 척하면 도를 아십니까 혹은 길을 묻는 정도가 아닐었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내가 한국 가서 길을 걷다 모르는 사람이 먼저 인사하거나 말을 걸어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다.
2024년 1월 24일이 딱 7년 차로 접어드는 날이었다. 오래 살았구나. 처음에는 1년만 살아도 잘 버티는 거라고
했었는데, 어느새 6년을 꽉 채우고 7년이라니, 이 또한 새삼 놀랍다. 처음 남아공에 와서 모르는 사람이 내게 인사할 때 적잖게 당황했다.
"나... 알아? 왜 나한테 인사해?"
어색함의 극치였던 헬로 하와유는 이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을 때 유난히 밝게 웃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럼 나도 목소리 톤이 한 톤 올라가곤 한다. 상대의 표정과 미소에 내 마음이 녹는달까.
처음 만났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 있다. 좋은 에너지가 막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 있다. 표정, 말투, 목소리에서 느껴진다. 한마디만 했는데도 주변이 환해지는 사람이랄까, 간혹 온라인 줌에서 만나 한 두 마디만 주고받아도 그런 사람이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자연스럽게 나를 반추해 보게 된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로 대할까, 다른 사람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떤 에너지를 받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 생각은 나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표정을, 말투를 따라 해 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사를 하려고 한다. 2월 말에 이사 일정이 잡혔다. 이사를 나가야 하니,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올 다음 세입자들이 집을 보러 온다. 집주인은 최대한 우리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한 번에 사람들을 몰아서 데리고 온다. 오늘도 두 가족이 다녀갔다. 집을 보러 온다고 하니, 며칠간 방치해 뒀던 구석구석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한눈에 봐도 깔끔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어차피 우리 짐 빠지면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취향에 맞게 살 테니 공간의 쓸모나 느낌만 볼 텐데 이사 나가는 입장에서도 좀 더 빨리 이 집이 렌트되었으면,하고 신경쓰인다. 나도 다른 집을 보러 가면 그 집의 분위기나 가구, 배치, 인테리어가 공간에 영향을 더 받는다. 공간은 같은데, 무엇으로 그것을 채우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늘 보러 온 두 가족 중 두 번째 온 가족은 젊은 부부였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집주인에게 듣고는 북한인지 남한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구와 울릉도에서 영어 교사로 3년간 일했던 경험이 있다며 반갑게 인사했다. 뭐 여러 가지 짧은 정보를 나누고 잘 봤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헤어지면서는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자기 발음이 어떤지도 한 번 더 물으면서 말이다. 발음이 완벽했다고 말하자 남자분이 장난꾸러기처럼 양손을 하늘로 들어 엄치를 치켜들며 "예이~"하고 외쳤다. 그 모습을 보는 데 웃음이 났다. 저런 사람들 알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잠시 스쳤다. 짧은 만남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이사할 생각을 하니, 새로 이사할 방을 어떻게 채울지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어차피 가구도 똑같고 공간만 바뀔 테니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자잘한 소품으로라도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단 생각을 순간순간해 본다.
사람도 방도 똑같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환경은 바뀌지 않는데 무엇으로 방을 채우느냐에 따라서 방의 분위기와 용도가 달라진다.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데 어떤 말과 생각과 태도로 나를 채우느냐에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나의 태도나 반응은 매번 달라질 수 있고, 그게 때로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힘든 상황,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단 긍정의 태도를 자동반사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정도의 반응 고수가 되려면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힘든 상황에서도 무조건 긍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놓였을지라도 그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뱉는 첫마디와 생각과 행동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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