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다짓기 최주선 Jul 21. 2024

소리소문 없는 시간

레이첼 편

해변 달리기, 책방소리소문, 애월카페사거리, 야시장



3킬로미터쯤이야!
얼마나 뛸까? 3킬로? 너무 짧지 않나?
5킬로? 아니다. 3킬로 뛰자.


일단 뛰기는 해야겠는데 어느 해변을 곁으로 뛰어야 할지 길을 못 찾겠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드라마 우영우 변호사에서 나왔던 돌고래가 등장하는 해변이었다. 계획대로 그 장소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중간 지점에서 적절한 곳을 찾아 뛰기로 했다.

"여기면  됐어."

해변을 옆에 두고 달리다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나는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아침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꿈같았다. 바다는 구경할 수 없는 남아프리카 프레토리아에서 7년을 살면서 늘 그리워한 게 바다다. 탁 트인 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아침 바람맞으며 옆에 같이 뛰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또한 그 사람이 늘 같이 뛰어보고 싶었던 리나라니. 완벽한 아침이다. 서로의 달리는 모습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는 건 의무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남는 건 기록 밖에 없으니 말이다.


달리기가 이렇게 힘들일인가. 나름대로 운동했었는데, 1년 동안 띄엄띄엄했던 게 티가 났다. 리나는 늘 주말이면 3킬로, 5킬로, 8킬로까지도 뛰었고, 10킬로 마라톤도 했었다. 고작 주 1회라고 했지만 그렇게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3킬로 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남편과 몇 차례 동네를 3킬로, 5킬로도 뛰었지만 달리다 힘들땐 걸으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도 리나와 뛰다 걷다 하면 되겠거니 했지만, 리나는 사진 찍을 때 빼고는 쉬지 않았고, 나는 멀지 감치 따라가느라 숨을 헐떡였다. 세상. 3킬로가 이렇게 멀 줄이야. 땀이 티셔츠 목 부분을 흥건히 적시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흘러내렸다. 땀범벅이 된 상태로 차에 올라타기 전 카메라를 켜고 릴스를 위해 한 번 더 달렸다. 젖은 티셔츠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신 물이 이렇게 달 줄이야.



오늘의 스케줄은 어제 급조해서 정한 거다. 어딜 갈지 뭘 먹을지 꼼꼼하게 계획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꼼꼼하게 스케줄 짜서 여행했던 리나도 이번 여행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 발길 닿고, 마음 닿고, 검색에 의지해서 가도 서로 부담 없는 시간임에 동의했다. 지난 3일간의 딱 맞는 가볍고 맛있는 요구르트와 블루베리 그리고 견과류, 달걀 프라이 아침을 먹고 우리는 <책방소리소문>으로 향했다.

장소는 소리소문 없는 곳, 정말 이런데 책방이 있어? 싶을 성한 곳에 있었다. 이 날도 "다른 길로 진입하지 않도록 유의하세요"멘트를 여러 번 들었던 터라 혹여나 잘못 들어간 건 아닐까 싶었지만, 네비는 계속해서 그 길로 가라고 했다. 구불구불한 마을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작고 아담했다.


 

항상 온라인으로 보던 독립서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난 뒤로 한국에서 살 때는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던 독립서점이 몹시 궁금했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서 늘 입맛만 다시던 한을 풀었다. 더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 책도 이곳에 진열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서점을 둘러보면서 잠시 고요한 한 시간을 가졌다. 리나는 이 책이 끝나면 저 책, 저 책 끝나면 이 책. 진열된 책을 꼼꼼히 보면서 한 권을 골라서 스킵하듯 읽고 있었다.

나는 책 보다 다른 볼거리가 더 눈에 들어왔다. 작게 쓰인 메모, 어떤 책인지 궁금하게 포장해 둔 블라인드 북, 필사 코너, 방명록 코너, 물에 젖지 않는 책,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역사의 흔적, ‘세상의 끝과 부재중 전화’ 2018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2021년까지 진행했던 차마 전하지 못한 10만여 통의 메시지 코너까지, 곳곳에 볼 것 투성이었다. 덕분에 나는 책에 집중하기보다 약간은 부산스럽게 관광했다.




다음 목적지는 <애월카페사거리>다.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리나, 어느 카페를 가도 아메리카노만 시켰다. 유명하다는 애월카페사거리를 가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들어가는 길목에 좌우로 카페가 드문 드문 보였다. 주차를 하고 내려 쨍한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 양산이 없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여기가 제주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주변은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카페거리를 거닐며 유유자적하게 구경하고자 했던 우리 계획은 틀어졌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어차피 관광지니 정신없을 거란 걸 인정하고 구경하기로 했다. 어디서 봤던 바다보다도 애월 앞바다의 색깔은 푸르디푸르렀다.


카페보다 바다에 취해 한참을 바라보다 나왔다.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부러워 한 번 타볼까 했지만, 그 배에 앉아 뒷목이 다 익어버릴 것만 같아 다른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해변을 따라 걷고, 또 다른 길이나 카페가 있을까 궁금해 차도옆 인도로 걸었다.

기념품 샵에 들러 아이들과 가족들 줄 선물이 있나 보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제주 소품으로 가득한 소품샵에서 한참을 구경했다. 그러다 눈에 띈 탄생석 팔찌! 각자의 탄생석을 골라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나씩 집어 들었다. 나는 2월이니까 자수정, 리나는 5월이니까 에메랄드. 각자 하나씩 골라 나온 팔찌가 발찌라는 사실은 이때까지 몰랐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가 팔찌로 바꾸었다. 아직도 내 손목에 잘 채워져 있는 그 팔찌 말이다.

뜨거운 볕을 피하러 뷰가 좋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 음료와 디저트를 시켰다. 좌우 앞뒤로 앉은 수많은 중국인들은 셀카 찍어대기 바빴고, 빠르게 먹고 나가며 자리를 메꿨다. 그 사이 우리는 늘 하나 시켜도 남기는 통에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는 딱 하나만 시켰고, 결국 이마저도 살짝 남기고 나왔다. 그저 함께 앉아 주제를 바꾸어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여유롭지만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여행 중에도 소화해야 할 각자의 일이 있었음에도, 내일의 스케줄이나 해야 할 일 따위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이 시간은 기억을 더듬는 이 시간에도 그저 그리울 뿐이다. 글을 쓰며 다시 그때 그 시간의 그 장소에 잠시 앉아있다 나왔다. 디저트에 커피로 어중간한 시간에 배를 채웠으니 배가 고플 리 없었다. 제주에 왔는데 바닷가에 발은 한 번 담가야 하지 않겠냐며, 근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6월 중순에 막 진입할 무렵인 시기에 아직 해수욕장이 개장을 안 했겠다 싶었는데, 이미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 분위에게 동화되어 신발을 벗어 들고 바닷가에 발을 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닷가의 찬 기운에 더위가 싹 씻기는 기분이었다. 모래사장 위에 서서 발가락으로 Lena라고 썼다. 리나도 나를 따라 Rachel이라고 적었고, 이번 여행에서 1박 2일 정도는 함께할 줄 알았던 sunny이름도 적어 사진 전송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 날 새롭게 안 사실은 내 발사이즈와 리나 발사이즈가 같다는 거였다. 발 생김새도 색깔도 발가락의 모양도 다르지만, 사이즈가 같으니 서로의 한쪽 발만 겹쳐두고 한 사람인 양 장난도 쳤다. 남편에게 사진 전송하고, 누구 발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상해. 발이 이상한데?"라는 문자에 둘은 폭소했다. 이게 그리 재밌을 일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랬다. 여고생처럼 작은 일에도 킥킥거리거나 푸하하 거리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여고생 단짝 친구 같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나이 사십 넘어서 친구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선물이 아니고 뭘까.  


  

시원한 바다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가던 길에 원피스를 하나 사러 한 상점에 들렀다. 자동차로 지나오다가 발견한 상점이라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터였다. 걷는 걸 둘 다 워낙 좋아하니, 디저트도 먹었겠다 이참에 걸으며 운동도 하면 참 좋겠다 싶어 차를 두고 걸었다. 웬걸, 내가 생각했던 거리의 2배를 걸어야 했고, 미안한 마음과 멋쩍은 마음이 자꾸만 "어? 여긴가? 아니네. 아이고."를 연발했다.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목적지에서 나는 핑크와 하늘색 두 가지 옷을 두고 고민하다가 "핑크가 잘 어울리네!"라는 말에 결국 핑크 원피스를 집어 들고 나왔다.


저녁 식사 할 것 없이 한라 수목원 야시장을 가기로 했으니 가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그리고 뉘엿뉘엿 해가 질 틈에 야시장으로 이동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고,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관광지는 대부분 일찍 문을 닫는 통에 열심히 서치 하다가 찾은 곳이 야시장이었다.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많지 않을까 싶어 선택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게 불빛이 반짝이는 곳에서 헛헛한 배를 채우고 플리마켓을 구경했다.



다양한 푸드트럭,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플리마켓, 음식을 먹고 구경하는 사람들, 길에 늘어진 반짝이는 전구까지 뉘엿뉘엿해가지는 타이밍에 새삼 또 내가 한국의 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캄캄하고 가로등 불빛도 띄엄띄엄 있거나 아예 없는 곳의 남아공에서는 야시장과 불빛은 구경도 아니, 생각도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하지 않다고 해도 매 순간이 내게는 즐겁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한 바퀴만 더 돌아보고 가자며 상점을 둘러 걸었다. 결혼 이후 걸리적거려 잘 끼지도 않는 반지인데 하나 있었으면 했다. 실반지 한 2개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구경했다. 그러다 물고기 모양의 반지를 만났고, 리나와 우정 반지도 하나씩 나눠 끼기로 했다. 더불어 5000원짜리 실반지도 같이 구매했다. 레이어드 하면 더 이뻐 보였다. 낮에 구입한 탄생석 팔찌와 물고기반지가 우리 왼쪽 손에 끼워졌다. 약지, 중지, 검지를 옮겨가며 손이 붓지 않았을 때는 검지, 부으면 약지에 옮겨가면서 끼웠다.

  


끼고 빼기가 영 편치 않은 팔찌라 그냥 끼워두면 되겠다 싶기도 했지만, 팔찌도 풀릴 때까지 하자며 추억을 남겼다.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손목에 잘 붙어있다.  

우정을 나눈다는 것, 그런 우정의 징표를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 일터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우정템들이 있었다.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리나와 나는 14.000km 떨어져 소통하기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순간과 시간이 아쉬웠던 것도 맞다. 그래서 더욱 무언가 같이 소유하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나 보다. 사물에 얹힌 기억과 사물이 주는 소중함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같이 숨 쉴 테니까.


지나간 일상을 다시 더듬으며 쓰는 글은 그날을 온전하게 옮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더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글이기에 또 이렇게 기록을 남겨둘 수 있어서 참 좋다.

잠시 그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왔다. 소리소문 없이.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가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