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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작가 Jul 02. 2024

돌아가도 괜찮아.

리나 편


"으아아아!!!!!!!"

바닥에 앉아 영어 코칭을 하고 있는데, 내 다리 위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새끼손가락만 한 지네가 순식간에 내 다리를 넘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옆 방에서 코칭하던 레이첼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이미 저만큼 도망간 지네를 보자마자 레이첼이 밖으로 나갔다가, 살충제를 들고 와서 한참을 뿌려댔다. 이내 지네는 배를 뒤집어까고 저 세상으로 갔다. 

"살충제 어디 있었어요? 그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현관에, 저번에 들어오다가 봤지."

여러 번 집안을 들락날락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살충제가 레이첼 눈에는 띄었나 보다. 

참 관찰력도 좋다.

벌레 한 번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만 지르던 나와는 달리, 레이첼은 놀란 기색 없이 침착하게 사건을(?) 해결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는 법인데, 나는 뭐... 그냥 요란한 수레였다면 레이첼은 흔들림 없는 편안한 시몬스 침대?ㅋ 같은 느낌이었다.



제주 셋째 날.

숙소는 중문 관광단지와 가까운 안덕면에 있다.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다. 불금을 맞아 꽤 먼 거리를 다녀오기로 했다. 셋째 날의 목적지는 제주 동쪽 끝이다.

인스타를 보다가 '바로 여기야!'라며 꼭 가보리라 다짐했던 곳, 영주산이다. 산길에 수국이 알록달록 펴 있고, 산 중턱에는 저 멀리 풍차를 뒷 배경 삼아 소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그곳을 직접 눈에 담아보기로 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 걸렸나 보다. 초행길이기도 하고, 내 차가 아니라서 평소 운전 실력이 아니었다. 자꾸 길을 잘못 들어섰다.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에 네비 안내를 놓쳐서 우회전해야 할 때 직진하기 일쑤였고, 조금 더 가야 하는데 미리 핸들을 돌려 다른 길로 빠지기도 했다.

"아! 나 또 잘못 갔다. 왜 이러는 거야."

"리나, 가만 보니까 주변을 잘 안 살피네."

둘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실수 연발하는 내 모습에 레이첼이 나서서 '조금 더 가라, 빠져야 한다'라고 일러줬다. 네비까지 내 실수에 한마디 했다.


"다른 길로 유입하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사실 출퇴근하거나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돌아가면 어떠하고 조금 늦으면 어떠하리.

실수가 한두 번이 아니라서 조수석에 탄 친구에게 살짝 민망할 뿐, 나는 그냥 그랬다.

원래 나는 운전할 때 느긋한 편은 아니다. 앞에 차들이 막혀 있는데 옆 차선이 비어있으면 무조건 차선을 바꾼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게 답답하게 느껴져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달랐다. 쉬엄쉬엄 구경하며 달리고 싶은데 자꾸 뒤차들이 내 뒤에 바짝 붙었다. 하다못해 나를 추월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와... 평소에는 이런 경우 별로 없는데...'


이번 여행의 목적은 친구와 함께 하기이다.

어디를 가고,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이미 목적 달성이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들어서도 그냥 웃긴 에피소드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우측이든 좌측이든, 산이든 바다든간에 하물며 길 한복판도 모두 나의 목적지였다. 그래서 길을 잘못 들어서도 마음은 여유로웠고 그마저도 즐거웠다.



영주산.

관광객에게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인가 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다리에 진드기 방지제를 뿌린 후 산 길을 올라가는데, 방목한 소들이 여기저기 똥을 어찌나 많이 싸놨는지,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내 신발이 똥에 파묻히지 않으려면 시선을 땅에서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풍차를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산길을 둘이 나란히 뛰어가며 영상도 찍고 곳곳에서 둘이 꽁냥꽁냥 구경하고 촬영하느라 바빴다. 

뒤로 이어진 산길을 계속 올라가니 인스타에서 보았던 꽃 계단이 보였다. 나무 계단 양쪽에 색색의 수국과 산 꽃들이 줄지어 피어있었다. 조금 전 소똥과는 정반대 되는 풍경이라니, 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산이었다. 약 한 시간가량 올라가 도착한 정상에서는 360도로 제주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따가운 햇볕에 땀이 났지만 제주에 있으면서 산에 올라왔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웠다. 운동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제주의 자연과 함께해서 더 좋았다. 

친구랑 여행 취향이 맞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 하나 운동도 땀나는 것도 싫어하면 산에는 절대 못 올라왔을 거다.


산을 내려와서 제주 동쪽 바다를 바라보며 꿀맛 같은 흑돼지 오겹살을 먹고,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계획을 변경해 다시 숙소로 향했다. 한 시간을 넘게 운전해야 했다. 중간중간 졸음과의 사투에서 이겨내야 하기도 했다.



옆 좌석에는 레이첼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 내 마음이 순간적으로 수직 하강하는 걸 느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제주 여행의 끝은 다가온다는 생각, 한 달 후 레이첼이 저 먼 나라로 다시 떠난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순간적으로 교차했다.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리면서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그런 느낌.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래도 저래도 시간은 가고, 이 소중한 시간을 굳이 슬픔으로 채운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니까. 그냥 지금을 즐기자고 말이다.

그렇게 제주에 있으면서 내 마음을 몇 번은 다스렸던 것 같다.




이후로도 나는 여러 번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럴때마다 레이첼은 이런 내 모습이 꽤 익숙해진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거 아니? 우리 함께 가는 길에는 잘못된 길이 없다고 생각해. 조금 돌아가면 어때. 돌아가는 길 위에서도 우리는 즐거울 텐데. 더 성장하고 행복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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