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이 있는 집
마당이 있는 집.
드라마 제목같이 우리 집에는 마당도 있고, 정원도 있다. 꼭 부잣집이어야 할 것만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아공의 대부분의 집은 정원이 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정원을 가꾸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데, 집을 세 놓을 때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꼭 명시한다. 물도 매일 줘야 하고, 잡초도 뽑아야 하고, 예쁘게 잘 관리하고 말이다. 집이 클수록 정원 관리가 심각하게 힘든데, 보통 이런 경우 흑인 인력을 사용한다. 적절한 수당을 주고 원하는 만큼의 일을 시킬 수가 있다. 고로 집주인은 우리가 관리를 못하겠다면 인력을 고용해서라도 내 돈을 주고 관리하라고 말한다. 당당하게.
정원 관리의 필수 요건은 '물'인데, 물세가 집 렌트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집에서는 물세가 어마무시하게 나오기 때문에 관리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그러나 집주인이 "terrible"이라고 한마디 하면 내 돈이 줄줄 새어나가도 물을 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관리를 못한 채 집 떠날 때 보증금에서 깎아 버릴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다.
며칠 전 아침에 눈 뜨고 뒤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남편이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심각하게 스마트 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장문의 이메일이 적힌 화면을 들이밀면서 "아흐"라고 한마디 했다. 아이들 도시락도 싸야 하고 바쁜 아침 시간이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남편의 목소리가 영 신경 쓰였다. 스피디하게 얼른 쫙 훑어보는데 정확히 보지 않아도 경고 메일인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정확히 "경고 메일"이 될 거라는 단어도 적혀 있었다. 어쩐지 전날 뭔가 꺼림칙했던 게 떠올랐다.
요사이 단지 내의 집 단장을 한다고 지붕 색이며 창문틀 색깔을 바꾼다고 야단이었다. 집 앞에 흑인들이 왔다 갔다 하고, 우리 집 창문이며 문이며 죄다 열어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이미 다른 집은 다 끝나고 우리 집이 마지막이었다. 인부 세 명이 와서 집 밖에서 페인트 칠 하는 동안 냄새가 진동을 했다. 집에 있을 수 없었고, 남편과 운동을 하러 집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일이 끝났나 확인 차 집 문 밖에 설치해 놓은 CCTV를 보는 데 마침 그때 단지를 관리하는 백인 할머니 샌디가 우리 집에 다녀가는 모습이 딱 찍혔다. 흑인들이 정리를 잘했는지 확인하러 온 참이었던 것 같은데, 무엇을 보고 갔을지 약간 흠칫하는 부분이 있었다. 겨울 내내 잘 자라지 않고 죽어 있는 잔디 사이로 잡초가 무척 많이 올라왔는데 꽤 지저분한 상태였고, 커다란 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던 차였다. 집 정원 잔디를 깎아주는 단지 가드너가 있는데 거의 석 달을 깎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초토화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계속 신경 쓰이던 차였기에 분명 지난주에 한 차례 잡초를 직접 뽑았던 상태이기도 했다. 보통 9월 1일이면 다시 잔디 깎기를 시작하는 데 아무런 말이 없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중이기도 했다. 일주일 사이 비가 두어 번 왔고, 그 사이에 잡초가 또 자랐는지 육안으로 보기에도 좀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다. 바닥에 쌓인 죽은 나뭇잎이 영 거슬리던 차였다.
아뿔싸, 미리 좀 치웠어야 했는데 놓쳤다 싶었다. 분명 보고 가면 샌디가 우리 집주인 마레끼한테 연락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 남편과 한 차례 이야기를 한 상태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샌디는 마레끼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 메일을 받고 마레끼가 남편에게 메일을 보냈던 거였다.
메일을 받고 남편은 화가 잔뜩 났다. 이미 가드너에게 언제 시작할 거냐고 지난번 한 번 물어봤는데 비가 좀 많이 내리고 나면 다시 시작한다고 이야기를 들었단다. 게다가 가드너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면 가라지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열어 두지 않아서 못 들어왔다고 했다는 거다. 결국 우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관리를 못했고, 우리가 관리도 안 했고, 현재 상태는 엉망이니 내년 1월 안에 정원의 잔디를 파릇파릇하게 만들어 놓으라는 메일이었다. 당장 치우고.
남편과 나는 그날 오전 운동이고, 일이고 뭐고 다 미뤄 두고 둘 다 밖으로 나가 장갑을 끼고 정원에 있는 잡초를 몽땅 뽑았다. 그리고 큰 쓰레기봉투가 3 봉지나 가득 찰 만큼의 낙엽을 쓸어 담았다. 잡초를 뽑고 낙엽을 줍는 시간은 약 30분 남짓 걸렸다.
솔직히 우리가 관리를 안 한 것도 맞고, 지저분했던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씩 정리하고는 있었다. 2주 전에는 집주인이 키우던 고추, 피망, 토마토 가지를 뽑아내고, 라벤더, 파, 부추, 고추, 바질까지를 새로 심어 둔 상태이기도 했다. 우리 상황을 알리 없겠지만, 별안간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하는 게 맞나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마음에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 메일은 분명 "과한 경고 메일"이었기 때문이다. 잡초를 다 뽑고 이렇게 정리하는데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메시지와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전과 후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깨끗해졌다.
마무리 정리를 하는 사이 남편은 집주인 마레끼와 연락하고, 샌디 할머니와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샌디는 그저 노티스 메일을 보낸던 것뿐이었는데, 마레끼가 과하게 반응을 해서 우리에게 메일을 보냈던 거다. 샌디는 자신이 마레끼에 보낸 편지를 그대로 우리에게 보내 주었다. 그 메일에는 어떤 컴플레인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집주인에게 세입자와 상의해서 정리하면 좋겠다는 말 뿐이었다. 그런데 마레 끼는 우리가 주변 집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받아들였나 보다. 다른 집 사람에게 듣자 하니, 우리가 이사 오기 전 마레끼가 이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바로 옆집인 샌디 할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단다. 그 이유에서인지 이해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오류가 있기는 했다.
전체 정리하는데 30분도 안 걸렸다. 잡초를 뽑는 시간은 10분이 채 안 걸렸다. 이 정도 잡초라면 길이가 길어서 그렇지 그렇게 많이 난 상태도 아니었다. 지난주에 이미 한 차례 뽑았다.
정리 후 위의 내용이 담긴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 마레 끼는 왓츠앱에 음성을 보내왔는데, 메일에서 느꼈던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스트레스받지 말라며 그 정도면 됐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예민하게 반응을 해서 조금 놀란 눈치이기도 했다. 좋게 마무리도 되었고, 덕분에 미루던 정원 정리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반면,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 좀 의아하기는 했다. 그리고 오늘 추가로 가드너를 불러 돈을 주고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부분 정리를 부탁했다.
'진작 정리했다면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 텐데'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이미 몇 차례나 남편에게 그냥 가드너 기다리지 말고 잔디 뽑고, 지저분한 낙엽 정리는 우리가 하자며 서 너번 이야기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 김 화를 식히고 나서 "그래 우리가 정리를 안 한 게 맞지" 라며 "역시 아내 말을 잘 들어야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했지"로 일축했다.
나 역시 말만 하고 행동을 옮기지도 않았고 귀찮아서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이 집에 이사를 들어왔을 때부터 세입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간과한 것도 맞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미루면 일이 커진다. 커진 일에는 감정이든 신체 에너지든 뭐가 더 들어가기 마련이다.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아닌 게 못내 아쉽지만, 이렇게라도 거할 수 있는 집이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나는 지금 사는 집이 꽤 맘에 든다. 내년까지 계약인데 다시 같은 메일은 받지 않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