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티시스트였던 아줌마

커피는 커피잔에 맥주는 맥주잔에

by 로마

오래전 나는

붉은 넝쿨 장미가 온통 휘감고 있는 높은 담장에 초록이 짙은 넓은 잔디 마당이 있고, 대문에서 현관까지 예쁜 돌들이 놓여 있어서 비가 내려도 발이 젖지 아니하고, 그늘을 만들어 주는 잎이 무성한 키 큰 나무와 야생화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통창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층고가 높은 거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는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올려두고서, 차 한잔 옆에 두고 클래식한 음악을 들으며 무한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일상을 꿈꾸었던 적이 있다.


꽃이 피는 이면 봄이어라~설레어하고,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처마밑으로 떨어지는 낙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 부는 날엔 처마밑 풍경소리에 명상에 젖으며, 낙엽이 내리는 가을이면 가을이어서 센티해지고, 하얀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면 패치카에선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나고, 커피 한잔 들고서 통창으로 창가에 놓인 가죽으로 된 엔틱의자에 앉아 하얀 눈 내려앉은 마당을 감상하는 감성적인 일상의 꿈을 결혼 초에 꾸었더랬다.




감성이 풍부하던 학창 시절 나는 로맨티시스트였다.

중학생이 되어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게 된 것 같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면 우리 분단이 청소 당번이지만 청소는 아랑곳 않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였다. 점심시간에 읽던 책을 마저 읽어야 했기에, 그 덕에 생활기록부엔 협동심은 '다'였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시가 시화로 된 액자가 되어 도서관 복도에 걸리기도 하였다.


학교를 마치면 책이 많던 친구집에서 책을 읽다가 집에 가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책《 ex-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을 읽으며 이해되는 척하던 책부심이 있었고, 데미안이 되고 슬픈 베르테르가 되기도 하고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시, 산문, 에세이 특히 한용운, 윤동주 시와 한수산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학교를 가지 않던 일요일이면 베르사유의 장미 만화책을 여러 권 빌려서 동생들과 방바닥에 엎드려서 보며 그리스 신화에 빠져있었고 나르시시스트였고 에고이스트이스트였다.


바람머리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려 넘기며 나르시스인 양 혼자만의 멋짐에 빠져있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땐 멋진 글귀들을 메모해 두었다가 친구들과 대화에서 아는 체하며 인용하고 비 오는 날엔 심한 감성에 빠져 우산을 쓰지 않고 오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하던 유치 찬란한 센티멘털리스트였다.


지금 생각하면 등짝 스메싱 각이고 그 시절을 회상하면 이불킥을 여러 번 해야 할 일들이지만 그때 나는 톰보이였고 로맨티시스트였다.




결혼을 하면서 꿈을 꾸고 감성에 젖기에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책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 갔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에 미 비포 유(Me Before You)를 울면서 새벽까지 읽다가 남편한테 "안자나?"라고 듣던 말은 아득한 롱롱 어고(long, long ago)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밤새워 책을 읽는 일은 이제 없다.

지금은 노안도 오고 집중력 부족으로 책 읽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책 대신 웹소설, 웹툰을 보는데 작가사정으로 업데이트가 늦어지면 기억력 감소로 전편이 기억나지 않아 재 구매해서 읽어야 다음화가 연결되는 난감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점점 메말라가고 무덤덤하게 변해버린 감정은 사물에 대한 느낌마저도 예전과 달리 사뭇 달라지고 그러다가 이제는 남편이 강조해 주는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갱년기를 겪고 있는 아줌마로 살고 있는 지금은 열정은 예전 같지 않지만 아직 감성은 남아있다.


나는 물컵으로는 물만 마신다. 물컵으로는 당연히 다른 걸 담아 마시진 않는다.

같은 머그잔이라도 커피는 커피전용 머그잔에 마신다. 우유는 늘 유리잔을 고집한다.

술 또한 와인은 와인잔에 맥주는 맥주잔에 소주는 소주잔에 마신다. 용도가 다 있지 않는가?

찻잔, 커피잔, 맥주잔, 와인잔, 소주잔, 막걸리잔 등등. 나는 맥주를 고블렛 유리잔에 마시는 걸 선호하는데 거품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 머그잔에 마신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만큼은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다.

눈으로 마신다고 하지 않는가? 각각이 가진 고유의 맛을 눈으로도 느끼고 싶다.


남편은 아무 컵에나 마시면 되지 별스럽게 군다고 핀잔을 주지만 잔이 주는 분위기는 포기할 수 없다.


넝쿨장미 담장이 있는 마당엔 파아란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고 손질이 잘된 넓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예쁜 찻잔에 담긴 차 한잔을 마시는 오래전 꿈꾸었던 로망은 아니어도 커피 한잔을 마셔도 분위기가 좋거나 뷰가 좋은 카페를 찾아가듯 장소가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 수 없다면 집에서 한잔을 마셔도 그것이 커피가 되고 차가 되고 술이 될지언정 한잔에 담기는 느낌 좋은 감성을 포기할 순 없다.

커피는 커피잔에 맥주는 맥주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