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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Aug 29. 2020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

코로나 19와 함께 개봉!

코로나 시국에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이 개봉했습니다. 물론 개봉이라고는 해도 눈 크게 뜨고 살펴야 간신히 상영하는 극장을 찾을 수 있고 찾게 되더라도 과연 내 생활 반경 안에 해당 상영극장이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아마도 확률 상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그런데 정말 운이 좋아 가까운 곳에 해당 극장이 있다고 쳐도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하는 시간표에서 원하는 시간까지 맞아떨어지기는 정말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뭐 그마저도 맞아떨어졌다 치죠. 하지만 아직도 문제가 남아있네요. 바로 코로나 19.

정부는 어제 2.5단계 방역 수칙을 내놓았습니다. 음식점은 이제 9시가 넘으면 배달만 허용되고 카페는 매장 안에서 취식은 금지, 테이크아웃만 된다고 합니다. 영화관은 그나마 중위험 시설군에 속해서 당장 문을 닫지는 않나 봅니다. 이런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질병관리본부에서 매일매일 심각성을 알리며 제발 당분간은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약속도 잡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정말 간곡하게 부탁하는 중차대한 상황에서 “드디어 제가 만든 다큐영화가 개봉했습니다. 그러니 다들 보러 오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미래를 알 수 없는 건 현재를 살게 하려는 뜻일 겁니다. 얼마 전부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오면 자조적으로 중얼대곤 합니다.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었다고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르니까 오늘은 일단 살아야지요. 사과나무를 심으면서요.




엊그제 한겨레신문과 이메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 주소 링크입니다.

http://naver.me/5Cl7YuGq


지면 관계상 기사에 실리지 않은 부연 설명들을 조금 남겨봅니다.


개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그래 왔던 동물입니다.

어릴 적 기억에 개를 키우는 집들은 마당에 개집이 있었고 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 게 본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문화가 들어서면서 개는 굳이 집을 지키지 않아도 됐고 낯선 사람을 보고 시끄럽게 짖어대는 건 이제 사람들의 공동생활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됐습니다. 그래서 짖지 못하게 성대를 제거당하는 개도 생겨났습니다. 사실 개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그래 왔던 동물입니다. 유계영 시인의 말처럼 개는 심지어 인간보다도 먼저 우주에 가서 죽었고, 또 어떤 개들은 평생 실험실에서 살다 용도 폐기됩니다. 수 만 년 전 짐승들의 위협으로부터 밤새 사람들이 편한 잠을 잘 수 있도록 지켜주는 대가로 스스로 사냥해 먹이를 구하지 않게 된 그때부터 개는 줄곧 그래 왔습니다. 그렇게 개는 인간 없이는 살 수 없는 유일한 동물 종으로 인간과 함께, 아니 인간의 필요에 의해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산에 올라가 고작 한 두 세대를 거친다고 해서 수 만 년에 걸쳐 삭제된 야생성이 회복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사나운 들개’라는 프레임은 개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억울한 일에 틀림없습니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은 누구나 탈출을 꿈꾸지만 개는 인간으로부터 탈출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들의 조상 개가 인간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래로 말입니다. 들개가 생겨난 원인은 사실 너무나 명쾌합니다. 인간이 버렸기 때문이죠.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람들이 개들을 버렸다는 사실보다는 버려진 개들이 사나운 존재가 됐다는 위험성에만 주목하려 합니다. 분명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한 표정을 짖는 개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촬영하면서 어떤 개도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1m 목줄에 묶인 채 산책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아가는 개에게서 행복한 표정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번식장에서 상품이 되기 위해 키워지는 개에게서 절망을 발견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던 개도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사랑받으며 살게 되면 언젠가는 온전히 행복한 표정을 되찾았습니다. 행복한 표정을 짖는 개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 개 앞에서 꼭 ‘힘든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라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과는 사실 같은 주제로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게 꼭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닙니다.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의 하이라이트인 '개와 고양이를 위한 음악회'를 기획하고 현실화시키는데 애써 주셨던 김이곤 예술감독님은 언젠가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음식점을 찾았는데 화장실이 너무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다면 음식 맛을 떠나 최소한 기본은 된 음식점이라는 신뢰를 갖지 않겠냐고요. 반대로 아무리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이라 해도 막상 화장실이 더럽고 관리되고 있지 않다면 과연 그 집의 음식 맛을 신뢰하고 즐길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누군가는 또 힘든 마당에 음식점이 맛만 있으면 됐지 화장실까지 깨끗해야 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굳이 화장실과 음식점의 비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행복한 개를 어디서나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사회에서 인간이 행복할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훨씬 높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한 개를 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고요.



누군가는 버리고 갔지만 또 누군가는 거두는 곳

다큐멘터리 마지막 장면에 유기견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고 누군가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합니다. 어떤 이들의 기준에서 보면 유기견을 구조하고 보호하고 입양시키고 심지어 해외로 보내는 과정들이 매우 비효율적인 활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같은 시선으로 보면 산동네 정상에 그랜드 피아노를 옮기고 연주자들이 빗속에서 개와 고양이를 위해 연주를 하는 것도 아마 쓸 데 없는 일에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문제시되는 현상들의 대부분은 바로 그 효율성만을 쫓다 그렇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적이냐 비경제적이냐, 효율적이냐 비효율적이냐 만을 기준으로 하면 선의를 가진 이들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들을 설명할 방법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때로는 쓸 데 없는 행동들 때문에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사마을이 그랬습니다. 그곳은 누군가는 버리고 갔지만 또 누군가는 거두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통해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곳에서 공동체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

얼마 전 폭우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 묻혔던 강아지들이 일주일 만에 기적처럼 구조됐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새끼 강아지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슬피 울부짖었던 어미 개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또 축사가 물에 잠기자 기어코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 새끼를 낳은 어미 소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유례없이 길었던 장마가 만들어 낸 이 이야기들이 감동을 주는 건 당연한 얘기지만 생명의 소중함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지도 차별하지도 않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동물에 대한 학대와 유기가 여전히 벌어지는 건 그들을 귀여운 존재, 대상으로만 볼뿐 생명으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일부 연예인이 펫숍에서 사 온 품종견을 데리고 TV에 나오면 그날 검색순위에는 그 품종견이 순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유기견 보호소에는 해당 품종견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잘못된 반려동물관으로 벌어지는, 사실은 흔한 일들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는 개와 고양이를 위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또 누군가는 그 다큐멘터리 안에서 연주를 하고 또 누군가는 그들의 음악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 주는 것. 작지만 그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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