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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Oct 24. 2020

불편한 제목

어쩌다보니 시작된 일 … ③

어쩌다보니 시작된 일 … ③

처음 지었던 다큐의 제목은 <벤틀리>였습니다. 벤틀리는 2019년 경남 양산의 개농장에서 구조됐는데 이름은 당시 구조하신 분이 좋은데 (해외로) 입양 가라는 의미로 지어줬다고 합니다. 개농장 출신에 더군다나 벤틀리처럼 덩치 큰 개의 국내 입양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이름 덕분이지는 몰라도 벤틀리와 함께 구조된 포르셰는 미국으로 입양 갔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벤틀리도 지금은 잘 지내고 있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는 국내에서(?) 임시보호 중입니다. 현재 보호하고 계신 분들은 밝게 웃으시며 아마도 임보는 임보인데 영구 임보가 될 거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벤틀리는 이번 다큐에서 이야기를 열고 닫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트로와 엔딩에 등장합니다. 분량과 무관하게 나름 상징적인 역할이다 보니 자연스레 <벤틀리>가 제목이 됐습니다. 그랬다가 문득 <벤틀리와 친구들>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벤틀리는 운이 좋아 제2의 견생을 살고 있지만 지금도 수많은 개농장에는 ‘벤틀리의 친구들’이 다만 운이 좋아 살아남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몰랐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목을 접하곤 다들 예능프로에 나오는 꼬마 얘기냐고 물었던 겁니다. 알고 보니 벤틀리는 요즘 CF에도 자주 나올 만큼 유명한 꼬마 예능인의 이름이더군요. 

아무래도 다른 제목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다큐 후반부에 썼던 자막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벤틀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가 내게도 있다고.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 …


그래서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를 새로운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위의 반응이 어떨지 조금 신경이 쓰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개식용에는 반대하지만 주말에 손흥민 경기를 보며 치맥을 즐기고, 기분이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가라는 농담에 웃을 수 있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제목의 ‘고기’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어쩐지 불편함으로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랬으니까요. 



누구도 남을 해칠 자유는 없다.


얼마 전 뉴스에 지하철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타서는 마스크를 써달라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나한테는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문득 개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개를 먹든 뭘 먹든 당신들은 상관하지 말라며 ‘무엇이든 먹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습니다. 누군가는 그건 다른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제가 볼 때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았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자유에는 나의 욕망만 담겨있을 뿐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제거되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그건 자유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이번 다큐를 만들게 된 계기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라는 제목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면 그게 과연 좋은 제목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목 때문에 미리부터 외면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좀 더 나은 제목은 없을까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당신들이 아무 거나 먹을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개는 인간의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다큐의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말인 만큼 제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에 참여해 주셨던 동물권 활동가분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건 좋은 제목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뭔가 놓친 걸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 자체가 옳지 않았습니다. 개는 이미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개는 언제나 고통을 느끼면 아프다고 말했고, 행복할 때는 항상 행복하다고 말해왔습니다. 물론 그들의 언어로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알아들었지만 또 누군가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은 사람 위주의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이 아니라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개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개가 하는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인간의 먹이가 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그들의 외침 또한 이미 들었을 테니까요.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


이번 다큐는 개식용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개를 식용으로 섭취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 또한 맞고요. 하지만 그냥 둔다면 과연 언제쯤 완전히 사라질까요. 10년? 20년? 그렇게 기다리는 사이에 운이 나쁜 개들은 결국 고기의 형태로 삶을 마감하게 되겠지요. 결국 지금 끝내는 게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일 겁니다. 하지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 정부는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핑계 삼아 어떻게든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료주의의 속성만을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이 모든 게 다큐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럴 겁니다. 그럼 개만 안 먹으면 되냐고요. 어쩌면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분들은 비단 개가 문제가 아니라 모든 농장 동물을 대상으로 육식을 금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질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 한 시간 남짓한 다큐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라는 제목을 최종 편집본에 마지막으로 새겨 넣으면서 ‘고기’라는 단어가 던져 줄 여러 가지 질문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당연히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온전한 채식주의자는 아직 아닙니다. ‘아직’이라고 한 건 어쩌면 어느 시점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어느 때부터인가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사람은 결코 안 변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사람은 언제나 변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게 좋은 쪽인지 그 반대인지가 문제일 뿐이지요.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게 정상이었던 사회가 존재했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성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 나라가 유럽에 존재했고요. 그래서 임진왜란 때 곤궁한 백성들이 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을 들이대며 우리나라에는 개를 먹는 고유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니까요.


아! 그리고 제목은 결국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가 되었습니다. 제목에서 오는 불편함이 어쩌면 다큐가 하고 싶어 한 야기일테니까요. 



<고기가 되지 않을 자유>는 제3회 카라 동물영화제에서 온라인으로 상영됩니다. (10.30 ~11.4)

https://blog.naver.com/animalkara/22212416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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