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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May 15. 2017

연극은 계속된다 ...

버드맨 (2014, Birdman OR)

좋은 영화를 보면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난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ㅜㅜ) 아무튼 <버드맨>도 그런 류의 절망감(?)을 안겨준 영화 중 하나였다. 배우의 연기는 물론이고 촬영, 조명, 미술, 음악, 각본 ... 어느 것 하나에서도 부족하다거나 아쉬운 게 느껴지지 않았다. - 물론 그해 <버드맨>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자 이왕이면 다른 작품이 받았어야 좋았다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었고, 또 그냥 지루할 뿐이었다는 일반관객의 리뷰도 꽤 있었지만 그거야 그 사람들 사정이고, 난 그저 천재적인 감독과 장인이라 불러도 좋을 스텝들이 빚어낸 결과물에 놀라워했고, 잘 만든 영화만 보면 부러워하는 나 자신을 잠시 한심해했다. -



멕시코 출신인 알레한드로 G. 이나리튜 감독은 헐리웃으로 넘어와 <21그램> <바벨> <비우티풀>을 차례로 만들었다. 세 작품은 나름의 일관된 정서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앞의 두 편만 그렇다고 말한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 그의 영화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그게 곧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랬던 그가 원샷으로 찍을 수 있는 코미디(?)가 하고 싶다며 만든 게 바로 <버드맨>이다. (버드맨이 왜 코미디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코미디 맞다. 조금 친절하게 말하자면 블랙 코미디라고 하면 되겠다. 아무튼 ...)




형식이 곧 내용이다.


영화 속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은 한때 잘 나갔던, 아마도 SF 히어로물일 ‘버드맨’ 시리즈의 주인공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을 잊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신경증 환자일 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연극을 선택한다.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해 예술가로 인정받는 걸 남은 삶의 목표로 삼은 걸 보면 한때는 꽤나 많은 돈을 벌어다 준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가면 쓴 히어로물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과거는 아니었던가 보다. (사람들은 때로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도 될 만할 때 오히려 스스로 불행을 찾아 나서는 경향이 있다.)


어찌됐든 이 부분에서 재밌는 건 바로 감독의 의도다. 감독은 극중 리건을 통해 연극은 순수예술이고 상업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영화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해내고야 만다. 두 시간 동안 벌어지는 롱테이크 미학의 향연은 심장을 쿵쾅거리게 할 만큼 기술적으로 놀라웠지만 그게 그 자체로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촬영을 맡은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이미 <칠드런 오브 맨> <트리 오브 라이프> <그래비티> 등에서 신기에 가까운 롱테이크 실력을 이미 지겨울 만치 보여준 바 있다.) 진짜 중요한 건 바로 영화에서 형식이 내용을 어떻게 보다 더 심화시킬 수 있는지를 감독이 실증해 보여줬다는 점이다. (* 내가 왜 <버드맨>을 보고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오랜만에 정말 영화다운 영화를 봤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던 거 같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다?

촬영에 루베즈키가 있었듯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원천을 제공한 네 명의 각본가들(이나리튜 감독을 포함한) 또한 영리하기 그지없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헐리웃 영화산업과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자신의 말(보나마나 독설) 한마디로 연극의 흥행을 쥐락펴락하는 고집 센 할머니 비평가를 등장시켜서는 “도대체 예술가가 아니라 비평가가 되는 사람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 들을 땐 대충 이런 뜻이었는데 정확한 대사인지는 모르겠음)”와 같은 대사를 던지고 또 리건 역에 마이클 키튼을 캐스팅함으로써 (마이클 키튼은 알다시피 <배트맨> 시리즈의 주인공이었고 극중에서 리건이 <버드맨>을 찍은 마지막 해로 나오는 1992년은 마이클 키튼이 <배트맨>을 마지막으로 찍었던 해와 같다. - 이게 그냥 우연은 아니겠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와 현실 사이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우린 리건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셀레브리티로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목격하고 (셀레브리티는 희한하게도 우리나라로 오면서 ‘공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그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정치인보다도 훨씬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걸 보면 이게 웬일인가 싶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그 분야만큼은 살짝 미쳐있는 게 틀림없다.) 더불어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는 퍼거슨의 말처럼 소통이라는 명분하에 정작 불필요한 정보일수록 더욱 빨리 공유되는 SNS 문화까지도 짚어 본다. <버드맨>은 그러니까 블랙코미디로서 다루어야 할 세태풍자의 핵심들이 마치 우등생이 쓴 모범답안처럼 숨 가쁘게 열거된다. 그것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이다 ...



삶은 예술을 모방하고 예술은 삶을 모방한다.


영화는 컷의 예술이고 편집을 통해 완성된다. 어쩌면 그게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하지만 <버드맨>은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져있고 (물론 기술적으로는 나뉘었겠지만) 덕분에 평소같으면 후반작업으로 이루어져야 할 편집도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미 거의 대부분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럼 감독은 굳이 왜 이런 작업을 선택했을까? 물론 그 답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의도를 깨닫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답은 이렇다.

막이 오른 이상 무대에 오른 배우는 내려올 수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막이 내리기 전까지 연극은 계속된다. 마치 태어난 이상 죽기 전까진 삶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

I did.

And what did you want?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Late Fragment” _ 레이먼드 카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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