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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Dec 10. 2017

별 일 없이 산다

영화 <패터슨>이 부러웠던 이유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 드라이버다. 패터슨에는 한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883-1963)라는 시인이 살았다. 그래서 여행객들 중에는 윌리엄스의 발자취를 찾아 패터슨을 방문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매일 버스 운전석에 앉아 이 소박한 도시의 곳곳을 누비는 패터슨은 틈틈이 작은 노트에 그날 하루 동안 보고 느낀 단상들을 詩로 옮기곤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Monday’라는 자막과 함께 부감으로 패터슨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행복한 잠에 빠져 있는 침대를 보여준다. 알람 소리는 울리지 않지만 패터슨은 잠에서 깨어 침대 맡 협탁에 놓인 손목시계를 집어 들고 시간을 본다. 시침과 분침은 6시 10분에서 30분 사이의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패터슨이 시계를 손목에 차는 동안 아내는 눈을 감은 채로 지난밤에 꾼 꿈 얘기를 한다. 행복한 꿈이었다고. 그리고 꿈에서 아이들을 갖게 되었는데 쌍둥이였다고 … 그 말 덕분인지 그날 이후 패터슨의 눈에는 유독 쌍둥이들이 눈에 밟힌다. 아무튼. 


패터슨은 우유에 후레이크를 말아 먹고 아내가 싸준 철제 도시락 통을 들고 출근을 한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상사로 보이는 남자는 아침부터 피곤에 찌든 얼굴로 패터슨과 인사를 나눈다. 패터슨의 버스는 패터슨 곳곳을 누빈다. 카메라는 짐 자무쉬의 인장과도 같은 수평 트래킹 샷을 통해 패터슨의 풍경을 보여준다. 버스를 운전하면서 패터슨은 어쩔 수 없이 매일매일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고,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그가 쓰는 시의 영감이 되어준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패터슨은 예술적 감성이 충만한 아내로부터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주말에 컵케이크를 만들어 장터에 나가겠다거나 기타를 배워서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는 꿈 등등)을 귀 기울여 듣고 아내가 만들어주는 저녁을 먹고 그리고 동거견인 잉글리쉬 불독 마빈과 함께 밤 산책을 나간다. 그리고 산책 중 동네 펍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며 바텐더와 혹은 손님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패터슨은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


어두워졌던 화면이 다시 밝아지면 패터슨은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고 “Tuesday”라는 자막이 뜬다. 이쯤 되면 관객은 이제 눈치를 챘을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앞으로 일주일간의 패터슨의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간혹 영화와 관련한 강의를 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보통 첫 시간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여러분들이 멀티플렉스에서 보아온 영화의 90% 이상은 동일한 플롯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선한 주인공은 언제나 사상 최악의 악당과 싸우게 되겠지만 결국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지구를 지켜낼 것이다. 거기에 열린 결말 따위는 없다. 상업영화의 시나리오는 공식대로 쓰여질 뿐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영화에서 갈등은 크면 클수록 좋다. 해소됐을 때 기쁨과 감동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사건 없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 사건의 크기와 의외성은 영화초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키(Key)가 된다.” 뭐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끝나고 나면 떠든 나 자신에게조차 의문이 남는다. 과연 영화는 그런 것일까. 아니 그래야만 할까.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패터슨>은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의 일주일을 보여준다. 그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톱니바퀴처럼 이어지는 하루를 보낸다. 매일매일 사소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좀처럼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단 한번 가슴이 철렁하는 사건(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패터슨은 그 충격마저 안으로 새기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그냥 물 위에 쓴 낱말일 뿐이었다고. 여기서 ‘그건’ 물론 그가 쓴 ‘시’다. 


 

애봇과 코스텔로가 나오고 앨런 긴즈버그가 나오고 에밀리 디킨슨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패터슨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회자된다. 그들은 패터슨 출신이거나 아니면 시인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뜬금없이 윌리엄스의 발자취를 찾아 일본에서 왔다는 여행객은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며 패터슨에게도 혹시 시인이냐고 묻는다. 패터슨은 아주 잠깐 망설이지만 아니라고 답한다. 그리고 자신은 버스 기사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본인은 “아주 시적이군요. 윌리엄스의 시가 됐을 수도 있잖아요.”라며 웃는다.

시인이면서 의사이기도 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 세계는 만연한(?) 상징주의 대신 주위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객관주의’ 시였다. 영화에서 패터슨이 쓰는 시 또한 그렇다. 다소 뜬금없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일본인은 떠나면서 패터슨에게 빈 공책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텅 빈 페이지가 때로는 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곤 하죠.”


짐 자무쉬 감독에게 영화의 영감을 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




영화를 준비하다 투자사로부터 시나리오를 거절당하는 건 개인적으로 사건이라기보다는 흔한 일상에 가까웠다. 그들은 언제나 두 눈이 번쩍 뜨일만한 그럴듯한 사건을 기대하고 이야기든 캐릭터든 보편적으로 ‘쎈’ 영화를 선호했다. 


“시나리오는 좋은데 사건이 좀 약하지 않아요?” 

“주인공이 너무 착해요.” 

“여주인공을 여기서 죽이면 어떨까요?”

“액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이런 게 될까요?” 


그동안 자주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다행히 실망보다는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이젠 그들이 좋아할만한 시나리오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영화는 만들어지는 게 우선이니 못 하겠다고 먼저 물러설 일은 아직 아니다. 


아무튼 <패터슨>을 보고난 후의 감정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질투심’이 들었다고 말할 거 같다. 이건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가 아닌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상투적으로 건네는 “별 일 없지?”라는 인사에 “응. 별 일 없어.”라고 대답하는 그런 영화. 그런 게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니. 이건 오로지 짐 자무쉬니까 가능한 영화였다. 그러니 질투심이 솟아오를 밖에.


나도 모르게 헐리웃 상업영화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행위는 낯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주인공의 일상을 쫓아가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하며 불안감에 휩싸이고 도대체 악당은 어디 숨어있지? 궁금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불안과 의문이 지워지면 온전히 영화에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이는 아내의 잠든 얼굴, 반짝이는 오전의 햇살,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스쳐가는 사람들의 대화들, 아내가 만든 정체불명의 파이를 먹고 표정 관리해야 하는 찰나의 순간, 나와는 항상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는 반려견에 끌려가는 산책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는 맥주 한잔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라고 했지만 그건 오해고 잘못이었다. <패터슨>은 어떤 영화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벌어지고 또 봉합되는 영화였다.


<패터슨>을 구상하며 나는 이 영화의 구조를 일상의 메타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그 전날의 변주이지 않나.
간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강렬한 드라마나 충돌, 액션이 포함되지 않은 그런 영화 말이다. 여자가 희생되고, 자극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에 대한 해독제 같은 작품이 되었으면 했다.

- 짐 자무쉬 (씨네21에 실린 인터뷰 中) 



<PS> 

극중에서 패터슨이 쓰는 시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현대 시인 론 패짓(Ron Padgett)의 기존 시를 허락 받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버스 드라이버로 출연한 아담 드라이버는 우리 기준의 미남형 배우는 아니지만 요즘 헐리웃에서는 그야말로 핫한 배우다. 새로 나온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그닥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안타고니스트 카일로 렌을 맡고 있다.  

<패터슨>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펼친 배우는 역시 잉글리쉬 불독 마빈이 아닐까 싶다. 마빈의 본명은 Nellie라고 한다. 극중에서는 수컷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암컷이었고 안타깝게도 영화를 찍고 나서 병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ㅜㅜ

아, 그리고 생각났는데 고딩시절 어느 영문법 참고서에서 보고 외웠던 “여름에는 노래가 절로 나온다.”는 영어문장 “In summer, the song sings itself.”가 바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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