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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Jan 16. 2018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칠월과 안생

얼마전 본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원제는 <칠월과 안생>이다. 칠월과 안생은 극중 두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칠월과 안생은 열세 살 때 처음 만났고 스물일곱 살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당연히 그 사이 두 사람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가리켜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인디언들의 통찰은 실로 존경할만하다. 아무튼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당연히 내게 그런 친구가 있는지 여부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순서가 틀렸음을 알았다. 내 슬픔을 대신 등에 져줄 친구가 과연 누구일까를 궁금해 하기 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인지 그것부터 생각해봤어야 했다. 


친구가 형제와 다른 건 선택의 유무에 있다. 형제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운명이지만 친구는 철저하게 내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다. 또한 이성간의 끌림은 종국적으로 사회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준비해 주었지만 친구 사이에는 그런 것도 없다. 좋아서 만났지만 어느새 시들해지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게 친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라는 관계가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형제보다 반드시 하위단계로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다보면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주위 친구들을 떠올려봤다. 나랑 비슷한 취향과 성격이어서 친해진 친구도 있지만 나와는 성격도 취향도 다른데 바로 그 이유로 친해진 친구도 있었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칠월(마사순)과 안생(주동우)은 후자의 경우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모나지 않게 자라나 평범하고 안정된 미래를 꿈꾸는 칠월에 비해 안생은 애초에 따뜻한 가정도 희망찬 미래도 없다. 그럼에도 둘이 친해진 건 얼핏 속 깊은 칠월의 마음씀씀이 덕분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런 경우 마음의 부담을 안고 가는 쪽은 언제나 베푸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칠월과 안생은 열세 살 때 처음 만났고 스물일곱 살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당연히 그 사이 두 사람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평생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안생은 어느새 떠돌던 삶을 정리한 채 한 곳에 정착했고, 줄곧 안정된 삶을 바랐던 칠월은 정작 안생이 되어 하늘 아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결국 칠월은 안생이 됐고 안생은 칠월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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