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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진 Sep 12. 2019

눈물의 방송작가 입봉기

취재작가 3년 차, 메인작가님이 따로 나를 커피숍으로 불러내셨다. 또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오만가지 시나리오를 쓰며 커피숍에 따라갔을 때 메인작가님은 내게 입봉 제의를 하셨다. 입봉이란 피디나 작가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상제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취재작가에서 서브작가로 입봉 하게 된다는 건 회사원으로 따지면 승진을 의미한다. 그동안은 선배 작가들의 작업에 보조역할만 했다면 이제는 진짜 내 것, 내 영상물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더 이상 막내라고 불리지 않을 수 있고 '작가님'이라는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메인작가님의 입봉 제의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입봉이 무서웠다. 


보통 서브작가가 되면 10분 내외의 영상코너물을 담당하게 된다.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 구성안 작성, 자막과 대본 작성까지 모두 서브작가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취재작가로 선배들을 보조하면서 그 업무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섭외가 되지 않으면 밤새 리스트를 짜고 아침 8시부터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고, 출연자들을 설득해야 되고, 촬영 구성안은 몇 번이나 수정하고, 촬영 나간 피디의 연락이 오나 안 오나 노심초사 기다리고, 무사히 촬영 나갔던 아이템도 엎어질 수 있으니 예비 아이템도 찾아야 하고... 취재작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업무량과 책임감이 뒤따랐다. 


취재작가 시절에는 실수를 하면 나를 대신에 혼나 줄 선배도 있고 보듬고 수습해 줄 선배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브작가가 되면 실수에 대한 책임은 담당 작가가 져야 한다. 그 책임감이 나에게는 너무 무서웠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메인작가님은 그럼 우선 10분이 아닌 3분짜리 협찬 영상을 맡아보라고 하셨다. 협찬 아이템이었으니 이미 세팅된 촬영 내용과 구성이 있었다. 담당 피디도 제작진 중에서 가장 연차가 높았던 피디를 붙여주셨다. 나름의 배려였다. 


새벽 내내 떨리는 마음으로 가편 영상을 기다렸다. 아이템은 '실내정원 꾸미기'였고 영상은 3분 20초 분량이었다. 밤 11시 가편 영상이 내게 넘어왔다. 나는 영상을 보고 자막을 뽑고 리포터가 읽을 내레이션을 써야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6시간. 생방송을 하던 시기에는 워낙에 촉박한 환경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브작가들은 3시간, 많아야 4시간의 대본 쓰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나는 거의 두 배의 시간을 주신 거였다. 가편 테이프를 들고 편집실로 들어갔다. 테이프를 재생하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머릿속이 백지장이 됐다. 


무슨 자막을 써야 할지, 무슨 내레이션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등장인물이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본을 써야 하는데 어떤 말을 어떤 순서로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10초를 보다가 다시 처음부터 돌려보고를 반복했다. 10초의 내레이션을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한 시간 동안 한 문장을 수백 번 고쳤다. 시간은 흐르고 영상은 계속 제자리였고 원고는 오프닝도 넘기지 못했다. 생방송 시간은 다가오고 나는 저절로 눈물이 났다. (방송하면 참 많이 운다. 진짜 많이 우는 일이 생긴다.) 새벽 4시가 되자 메인작가님이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5시간 동안 꼼짝없이 편집실에서 나오지 않은 나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안 되겠는지 결국 날 구해주러 들어오신 거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날 보시더니 어깨를 토닥이시며 옆 자리에 앉으셨다. 그렇게 나는 첫 3분짜리 영상을 메인작가님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아니,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입봉을 3개월 미뤘다. 메인작가님은 처음은 늘 두렵고 힘든 거라고, 이겨낼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지만 난 아직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3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던 것 같다. 다시 울지 않을 수 있는지, 두려움과 맞설 자신이 있는지, 촉박한 시간 속에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매일 마인드 컨트롤하며, 선배들의 가편 영상을 몰래 다운로드하여서 집에서 대본 쓰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6시간, 5시간 걸리던 것이 점차 줄었다. 그리고 메인작가님도 내 연습 대본을 보고 수정해주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지금도 입봉을 앞둔 후배 작가가 있다. 두렵고 무섭고 틀리면 어떻게 하지,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많은 게 당연하다고 해줬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고, 네가 보기에는 큰 선배처럼 보이는 나도 울보 시절이 있었다고 용기를 주고 싶다. 비록 당당하고 멋진 시작은 아니었지만 난 도망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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