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선글라스와 헤드폰

미러렌즈나 노이즈캔슬링이 허락되지 않는 것들

by 남발

선글라스와 헤드폰은 원래, 세상과 나 사이에 얇은 층을 하나 더 만드는 물건이다.

사람들은 그 층을 끼고 잠깐 숨을 돌린다. 시선을 흐리게 하고, 소리를 줄이고, 나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를 조금 바꾼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선택한 감각으로 세계를 통과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걸 자유라고 느낀다. 아주 작고 크게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자유.


그런데 심판이 되고 나서, 같은 물건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갖기 시작했다.

코트 위에서 선글라스는 더 이상 ‘가림’이 아니라 ‘표식’이 된다.

또한, 헤드폰은 더 이상 ‘차단’이 아니라 ‘호출’이 된다.

눈과 귀를 덮는 도구가 오히려 나를 더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오래 남는 아이러니다. 물건이 바뀐 게 아니라, 그 물건이 놓이는 위치나 장소가 바뀌었을 뿐인데도.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부터, 나는 시선을 피해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시선을 모으는 사람으로 굳어진다.

선수들이나 관중들은 선글라스 안쪽을 보고 싶어 한다. 그 안쪽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말 보고 있는지, 혹시 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건 아닌지. 눈이 보이지 않을수록 눈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선글라스는 내게 ‘보이지 않는 면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증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날은, 공이 라인을 스쳤는지보다 내가 그 공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였는지가 먼저 재생되는 것 같고, 판정 하나의 옳고 그름보다 “당신은 제대로 보고 있는 심판이었나?”라는 질문이 더 선명하게 남는 것 같다.

나는 그 시선의 작동 방식을 종종 관찰하게 된다. 보통의 경기 사이에서 그 시선은 더 얇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작은 실수에도 바로 형태를 갖춘다. 반대로 경기가 팽팽하고 모두가 긴장한 날의 그 시선은 무겁고 오래 남는다. 그때는 판정이 틀렸다는 말보다,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라는 요구가 먼저 오는 것 같다.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앉아도, 어떤 날은 내가 그냥 표적으로 느껴지고, 어떤 날은 내가 재판장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재미있는 건, 그 둘이 자주 뒤섞인다는 점이다. 표적이면서 재판장. 판단하는 사람인데 판단받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감당하겠다고 결심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글라스는 눈을 보호한다는 기능보다 “지금부터 내 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에 더 가깝다. 이 눈은 내 휴식에 쓰이는 눈이 아니라, 타인의 승부와 감정과 경력과 시간을 통과시키는 눈이라는 선언. 그러니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내 얼굴에서 사라지는 것은 표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여유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앉아 있지만, 그 사람이 ‘개인’으로 앉아 있기는 어려워지는 순간.

헤드폰은 그 감각을 더 노골적으로 만든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자기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나에게는 세계가 들어오는 문이다. 그 문은 닫히지 않는다. 경기 중에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순간은 거의 없다. 소리가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라, 소리의 종류가 끊임없이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확인해 달라, 봐 달라, 정리해 달라, 결정해 달라 등등. 나는 좋아하는 음악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대신, 경기 내내 누군가의 질문과 요청을 통과시키며 내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노이즈 캔슬링이 아니라, 노이즈 수용. 거절의 장치가 아니라, 응답의 장치.


가끔은 희한한 장면이 있다. 헤드폰을 끼고 있으면서도, 아주 짧은 틈에 코트의 공기가 들리는 순간.

공이 라켓에 맞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고, 관중의 숨이 한 박자 늦게 따라오고, 볼 퍼슨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고, 선수가 바운스를 몇 번 하는지까지 귀에 들어오는 순간. 그때 나는 잠깐 착각한다.

아, 이제 집중이 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헤드셋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어온다. “확인 부탁.” “지금 상황 전달.” “다음 체인지오버 때…” 그 순간 깨닫는다. 내 집중은 ‘나의 집중’이 아니라 ‘상황의 집중’이라는 것. 내 세계가 고요해지는 집중이 아니라, 세계가 요구하는 집중.

이 두 물건이 주는 반전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코트에서의 선글라스와 헤드폰은 자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책임의 모양을 아주 구체적으로 만든다. 책임이라는 말은 늘 추상적이고, 멀리 있다.

누구나 책임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헤드폰을 끼는 순간, 책임은 추상이 아니라 감각이 된다. 눈앞의 거리, 귀 안의 압력, 질문의 속도, 시선의 무게 같은 것으로 변한다. 책임이 몸에 붙는 순간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심판이라는 직업에서 진짜 피로는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이 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닫을 수 없는 감각. 내 것이면서 내 것 같지 않은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통해 매 순간 결정을 내리는 일. 더 재미있는 건,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보다 결정을 “설명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정답을 원하지만, 정답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만 정답이 된다. 그 맥락을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일. 선글라스와 헤드폰은 그 일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어떤 날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서도 눈이 더 피곤하고, 헤드폰을 끼고 있으면서도 귀가 더 예민해진다. 보호를 위해 덮었는데 더 드러난다. 차단을 위해 막았는데 더 열린다. 한 번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익숙해질수록 더 섬세한 부분이 아프게 느껴진다. 익숙함이 둔감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직업이 있다면, 이 일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익숙함은 오히려 감각의 해상도를 높인다. 더 잘 들리게 되고, 더 잘 보이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이 감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이 두 물건을 매번 착용한다. 그게 규정이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도망치지 않겠다고 정한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의식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나는 개인적인 표정을 내려놓는다. 헤드폰을 끼는 순간, 나는 개인적인 침묵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내려놓음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지켜 준다. 나를 감싸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분명하게 해 주는 방식으로.


나는 가끔, 선글라스와 헤드폰이 심판의 권위를 만들어 준다고들 말하는 걸 듣는다.

(간혹 심판들 중 본인의 표정이나 눈빛을 들키지 않기 위해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내 경험에서는 반대다. 이 물건들은 권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권위를 시험한다. 그리고 그 시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매일 같은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어떤 날은 한 포인트가 한 사람의 하루를 바꾸는 것처럼 무겁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앉아 있어야 한다. 그 무게를 내 자리에서 견뎌야 한다.

오늘도 선글라스를 썼다. 오늘도 헤드폰을 착용한다.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의 거리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기 위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를 정돈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이 장비들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역할의 모양을 매번 다시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그 모양이 불편할수록,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느낌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고.

선글라스와 헤드폰은 결국, 나를 숨기는 물건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물건이다. 그리고 그 드러남 속에서 나는 매번 한 가지를 배운다. 판단한다는 것은 단지 정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 감각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라는 것. 흔들리면서도, 들리면서도, 보이면서도, 결국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것.


그게 내가 오늘 코트에서 느낀, 이 두 물건의 진짜 용도였다.

KakaoTalk_20260305_211815352.jpg


수, 토 연재
이전 04화4화. 그 자리에 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