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이 사라지는 방식에 대하여
요즘 ‘권력’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입안이 씁쓸해진다.
테니스 심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이 단어를 내부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판은 대회가 끝나면 썰물처럼 흩어지고, 다음 주면 또 다른 도시에서 만나는 프리랜서들이다. ‘뜨내기’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리의 연결은 느슨하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말한다.
“그 사람은 힘이 있다.”, “이번엔 누가 위원장이 된대.”
고작 일주일 남짓 맡는 역할에 ‘힘’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어딘가 어긋난 기분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힘의 실체란 결국 시합 배정을 한두 번 더 쥐는 정도일 것이다. 역량 평가표도, 승진 점수도, 누적된 데이터 시스템도 부재한 곳에서 말하는 힘의 범위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오래전 과거의 수준에서 멈춰 있다.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는 권력이 인간의 억제 시스템을 망가뜨린다고 했다(2003). 브레이크는 느슨해지고 가속 페달은 민감해진다. 아담 갈린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권력의 맛을 본 자는 타인의 관점을 채택하는 능력을 가장 먼저 퇴화시킨다고 했다(2006). 남에게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에게는 관대해지는 ‘도덕적 위선’의 출발점이다.
이 이론들이 기괴하게 발현되는 지점은 전문성이 아닌 ‘순서’가 권력을 결정할 때다. 국제무대의 등급이나 경험치와 상관없이, 장(長)의 자리가 어떤 ‘순번’에 의해 결정되곤 하는 기묘한 전통 말이다. 특히, 운동집단이 이런 면에서는 더욱 보수적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아마도 해당 스포츠에 대한 필요경험이나 능력치의 우선조건은 선출인지 비선출인지, 선출이라면 어디 출신인지 그런 것들일 거라 보였던 내 지난 경험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운동계에 유난히 두드러진 전통에 순응하고 맞춰주며 결국 그 자리에 앉은 이들 중 일부는 한때 간절히 조언을 구하던 이들이었다. 공동체의 발전을 믿으며 기꺼이 건넸던 노하우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대가를 바란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직함’을 다는 순간, 예외 없이 실망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태도는
“I deserve it(난 그럴 자격이 있어)”이다.
자신의 성취에서 타인의 조력을 지워버리는 ‘자기중심적 편향’의 전형이다. 그다음은 ‘회피’다.
도움을 받았던 시절의 기억을 마주하기 싫은 이들은 모호한 말들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마지막 단계는 ‘군림’이다. 쥐고 있는 작은 권한을 이용해 오히려 불리함을 주거나 서투른 위세를 떨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보상적 권위주의’라 부른다. 스스로의 실력이 직함보다 낮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때, 인간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더 공격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들에게 동료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초라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불편한 목격자’ 일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사립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곤 했다. 학교라는 조직은
특히 수평적인 전문성이 존재하는 다 같은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연차와 보직이라는 위계를 일부러 더 내세우려는 모습이 특이했다. 교사들끼리인데도 'OO선생님', '동료교사'로 부르기보다 보직 중에 학년부장이라도 맡은 교사라면 예외 없이 'OOO부장님'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문득 2010년 방영된 SBS 스페셜 ‘출세만세’(나는 ‘완장’ 편으로 늘 기억하던)가 떠오른다.
“나도 완장을 차면 달라질까?”라는 질문을 던졌던 그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는 ‘굳이 저런 것까지 실험하나’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장면들은 생생한 경고장처럼 되살아난다. 그 다큐가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상징이 태도를 어떻게 오염시키는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
한국은 호프스테데가 정의한 ‘권력 거리(Power Distance)’가 유난히 먼 사회다. 직급이 이름보다 앞서고, 나이가 호칭을 압도한다. 승진이 업무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재편’인 사회에서, 실력이 역전된 위계는 필연적으로 희극을 낳는다.
심판의 권한은 규정에서 나오고, 경기장 안에서만 유효하다.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기능적 역할일 뿐이다.
그런데 역할이 신분으로 오해되는 순간이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위치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 권한은 본래의 목적을 벗어난다.
코트 밖에서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권한이, 내부에서는 과장된 상징으로 부풀어 오른다.
실체보다 믿음이 먼저 커진다.
묻고 싶다.
그들이 말하는 그 “힘”은 정말 존재하는가. 아니면 서로가 그렇다고 가정해 주는 상징에 불과한가.
만약 후자라면, 그 믿음은 언제든 거둘 수 있다.
심판은 코트 위에서만 높다. 그 높이는 공정성을 위한 장치이지,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계단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권위를 지키려다, 가장 중요한 존중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