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징이 전혀 다른 감정을 만들 때
요즘 뉴스를 틀면 나라 이름이 먼저 들린다. 이란, 미국, 그리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 직업상 그곳 출신의 동료나 친구들이 있기에 부쩍 안부를 자주 묻고 있다. 지도 위의 선 하나가 사람들의 편을 나누고, 그 선을 사이에 둔 긴장이 오르내린다. '국가'라는 단어는 대개 그런 장면에서 '갈등'이라는 개념을 동반하며 등장한다.
그런데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공기로 치환되는 장소가 있다. 바로 경기장이다. 테니스에는 매년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이나 빌리진킹컵이 열린다. 이 대회들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테니스가 본래 철저한 ‘개인 종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판으로서 코트 위에 서면 테니스의 고독함은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 수만 명의 관중 앞에 선수 단 한 명이 서고, 랭킹과 상금, 그리고 매 순간의 판정을 감내해야 하는 책임까지 모두 개인의 몫인 종목. 3~4시간이 넘는 사투 속에서 오롯이 혼자 멘탈을 유지해야 하는 이 스포츠에 '국가'가 겹쳐지는 순간은 생경하면서도 뜨겁다.
국가대항전이 시작되는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경기 위로 나라의 이름이 내려앉는다. 관중석에서는 선수의 이름보다 본인의 나라이름을 외침이 먼저 터져 나오고, 포인트 하나가 끝날 때마다 경기장은 국가라는 공동체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평소에는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같은 포인트에 동시에 일어나고, 같은 실수에 동시에 탄식을 내뱉는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우리’라는 감각이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선발되어 선수들과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다. 선수촌에서 생활하며 느꼈던 그 경험은 선수 못지않게 특별했지만, 동시에 묘한 압박을 동반했다. ‘대표한다’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체어 위에서의 판정 하나조차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름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달린 국기는 자부심인 동시에 내가 짊어져야 할 공적인 무게였다. (실제로 논란이 되는 국가대항 경기에는 심판의 국적을 문제 삼을 때도 종종 있었다)
국가대항전의 코트를 지키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스친다. 국가라는 단어는 서로를 갈라놓는 칼날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거대한 자석이 되기도 한다는 것. 뉴스에서는 갈등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경기장에서는 응원과 연대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같은 상징임에도 등장하는 장면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국가대항전의 공기가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를 응원하고 있을지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경기를 바라보며 승패 너머의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쏟아지는 여러 속보와 긴장 상황들을 보며, 나는 그 두 장면 사이 어딘가에서 국가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슴에 국기를 다는 일이 누군가를 억압하는 짐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될 때, 비로소 국기는 환호의 상징이 된다는 것을 코트 위에서 배운다. 뉴스 속 국기가 편을 가르는 차가운 선(Line)이라면, 경기장의 국기는 낯선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따뜻한 실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라 해도, 갈등의 소음 너머에 경기장에서 마주했던 그 경이로운 유대감이 흐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내가 서게 될 코트 위의 국기가 누군가를 밀어내는 차갑게 그어진 선(Line)이 아니라, 공존과 이해의 이름으로 펄럭이기를 나는 그저 조용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