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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May 02. 2023

용돈봉투가 비었는데요

소통하며 삽시다.

요즘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소통의 부재가 불씨가 되어 거대한 불길 속에 휩싸여 있다. 수년간 쌓여온 불신과 불통의 결과다. 조직 일원으로서 화염 속에 억지로 끌려들어 가 있지만 시발점은 내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하지만, 줄곧 의문이다. 왜 그들은 한 번도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을까. 키보드 뒤에 정체를 숨기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들로 오해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을까. 나를 직접 드러내는 소통 방식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래도 때로는 용기를 내어 상대와 마주하 불씨는 사그라질 수 있다. 얼마 전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시어머님 생신 파티가 있던 주말이었다. 선약으로 잡아놓은 북클럽 대면 모임이 있던 날로 하루에 '두 탕'을 뛰어야 해서 평소보다 분주했다.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약속 장소에 아침 10시까지 도착하기 위해 눈곱만 겨우 떼고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는 길을 나서려는 순간. 고등학생, 대학생 시조카들에게 줄 용돈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돈봉투 2개를 만들어 먼저 시댁에 도착할 남편에게 주려하니 현금이 없었다.


"내가 이따  ATM 기계에서 현금 빼서 봉투 2개 만들어 갈게."


그리고선 봉투를 황급히 가방 안에 쑤셔놓고 출발했다.


1분의 낭비도 없이 꽉 채워진 7시간의 만남이었다.  현금을 인출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봉투와 함께 가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모임이 끝나자마자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는 시누이집으로 향했다. 점심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파티에 늦은 며느리는 몹시 겸연쩍어하며 어색하게 합류했다. 저녁까지 거하게 먹고 집으로 가려다 조카들에게 주려던 용돈이 생각났다. 쭈뼛쭈뼛하는 조카들 손에 의기양양 흰 봉투를 쥐어 주고 나왔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집에 오는 길. 갑자기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들이 뭘 놓고 왔나 싶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시누이의 난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ㅇㅇ야, 혹시나 해서 전화하는데 아까 애들 용돈 준 봉투가 비어있는 거야. 뭔가 착오가 있을 것 같아서."

"네?? 봉투에 용돈이 없어요?"

"응, 애들이 열어봤는데 빈 봉투래. 아무래도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좀 민망하긴 한데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전화했지."


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실수로 돈을 안 넣은 것 같다고, 바로 카톡으로 애들에게 용돈을 보내겠다고 급하게 마무리했다. 조카들이 빈 봉투를 보았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 정신머리 없는 숙모임에는 진작에 눈치챘겠지만, 이 정도 수준임은 사전에 감지 못했을 터.


서둘러 용돈을 보내고 생각했다. 시누이가 전화를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다소 껄끄러운 말이다. 그럼에도 시누이가 용기를 내어 전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시누이는 평소 나를 배려한다고 직접 전화하거나 카톡을 하는 일도 없다. 나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어른이지만, 내게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쉬웠을 리가 없다.


용돈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하고 넘어갔으면 아이들과도 시누이와도 내 관계가 다소 어색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빠르게 오해를 풀어준 시누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현 직장에서 만 14년을 꽉 채워 지냈다. 세상이 변하고 사내 문화가 변하고 있지만 아직은 상하 관계가 두드러진 이 조직에서 불통은 여전히 조직의 발전을 막아서고 있다.


요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저기요, 제발 다들 한 번 만나서 얘기 좀 하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전화 통화라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울 거예요."


그리고 나에게도 말해본다. 지금 저기 방 한구석에서 무언가에 토라져서 말 안 하고 있는 사춘기 초입의 첫째에게 가서 말을 걸어보라고. "아들아, 엄마랑 얘기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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