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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un 10. 2023

찌이이인한 사람이 되고 싶다.

"따르릉"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 수화기를 집어든 오른손에 힘이 꽉 쥐어졌다. 팀장님이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부서 구조상 팀장님은 1시간 넘게 떨어진 곳에서 근무한다. 팀장님은 꽤 괜찮은 상사다. 그래도 그녀의 전화는 왠지 부담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잔소리를 좀 들었다. 특유의 시크한 말투로 오늘 기안한 문서에 대한 지적을 했다. 나름의 해명거리가 있었지만 들숨에 삼켜버렸다. 지난 15년  경험 상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듣고 실행하는 게 정답임을 알기에. 이럴 때 나는 무색무취의 무점성 상태가 된다. 또르르 굴러다니는 가벼운 물방울 같다. 조직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 섞여서 티가 나지 않아야 하는 그런 존재.





소울 푸드 팟타이

흐릿한 모습으로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직장인들의 오직 희망,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오늘따라 홀로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고 싶었다. 약속 있다고 하고 사무실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을 찾았다. 1인석이 많아 혼밥 하기 제격인 곳이다. 수 백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 팟타이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미리 챙겨 온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읽었다. 십분 후 매콤 달콤한 국수가 나온다. 라임을 힘껏 짜서 골고루 뿌렸다. 내 자유함도 사방에 흩어졌다. 향긋한 라임향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먹방 시청을 하며. 나도 먹고 그들도 먹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먹는다. 무색무취의 아무개였던 나는 비로소 남봉으로 돌아온다. 그래, 이 맛이야. 그래, 이게 나야. 식사를 마치고 서점에 들러서 책을 들쳐보는 나의 모습에서는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짙은 바이올렛 빛깔이 찌이이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을 거다.






각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즈음부터였던가. 나름 자유로운 영혼이라 생각했었는데 20대 끄트머리쯤 다다르니 엷어지고 묽어지기 시작했다. 조직이 원하는 직원, 시부모가 기대하는 며느리, 남편이 바라는 아내,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엄마. 하나하나 역할이 늘어갈수록 내 빛깔은 서서히 바래고 있었지만 눈치챌 겨를은 없었다. 남들이 원하는 빛깔에 맞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크게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글쓰기라는 건 참 이상도 하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유라는 것을 하다 보니 '나'라는 존재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나는 뭘 좋아하지? 난 뭘 쓰고 싶지?' 생각하다 보니 무색무취의 인간이 된 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불만이 맘속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나만의 색이 진했던 그 시절. 글쓰기는 자꾸 그 시절 나를 소환한다. 그리고 등을 떠민다. 다시 너만의 색을 찾으라고.






다시 돌아온 현실 세계. 팟타이의 힘인가. 왠지 허리가 곧추 세워지고 어깨 죽지가 모이도록 가슴이 펼쳐진다.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무색무취의 나와 짙은 빛깔을 뿜어내는 내가 힘겨루기를 하는 듯하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나를 다시 찾는 여정을 멈추지 않는 이상, 승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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