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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ul 17. 2023

누군가에게 안기어 울 수 있다면

비가 내렸다 그쳤다 변덕을 부리는 토요일 늦은 오후.

봉투 끝까지 차오른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할 겸 집 앞 슈퍼마켓에 갈 채비를 했다. 한 손에 쓰레기봉투, 다른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공동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현관 바로 앞 세 단짜리 계단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젊은 남녀가 문 밖으로 보였다.

자동문이 열리고 내가 밖으로 나오자 문쪽을 바라보고 있던 젊은 남자가 힐끗 쳐다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포옹을 풀지 않고 앞에 있는 젊은 여자를 더욱 꽉 안아주었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키가 훨씬 더 큰 젊은 남자는 두 계단 아래 서서 키가 훨씬 작은 젊은 여자의 울음을 말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슈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집 앞에서 큰 소리 내며 울 정도라니. 큰일이 아니길 바랐다.


그나저나 누군가의 가슴속에 파묻혀 펑펑 울어본 게 언제던가. 아이를 낳고서는 한 번도 없었던 건 확실하다. 항상 혼자서 꺼이꺼이 울었다. 남편도 있고 아빠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들에게 안겨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는지, 강한 사람으로만 남고 싶었는지 잘은 모르겠다. 둘 다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집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조금은 부러워졌다. 누군가에게 기대에 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닌가. 그녀는 용기가 있구나. 받아주는 다정한 타인도 있구나.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다행히도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내 품에 와락 안겨 엉엉 울음을 토해낸다. 서러운 것도 어찌나 많은지. 오빠가, 동생이 맘에 안 들어 울고, 하고 싶은 일이 잘 안 돼서 울고, 문지방에 발가락을 부딪혔다고 운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우냐고 하면 더 크게 울고, '아이고, 그래쪄요.' 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쓰담쓰담하면 금방 멈춘다.


포옹과 눈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슈퍼에서 쪽파, 오징어, 브로콜리, 감자, 고구마를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욕심내어 주워 담다 보니 제법 무거워 한 손으로 들기 힘들었다. 내 상체만 한 장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끌어안았다. 식재료가 품 안에 들어오니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안기고 안아주는 건가. 소중함을 느끼고 또 표현하기 위해.




집 근처로 돌아오니 젊은 남녀는 아직도 함께였다. 자리는 옮겼지만 여전히 남자는 여자를 안아주고 있었고, 여자는 진정한 듯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쩐지 두 사람은 한동안 헤어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포옹과 거친 눈물이 지나간 자리가 단단해 보였다.


현관 도어록 여는 소리에 아이들이 신발장까지 뛰어나와 엄마를 부르며 와락 안겼다. 조그만 두 존재가 품에 안겨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모두 자연스럽다. 삶의 희로애락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아이들이 부럽고 또 보기 좋았다. 매일매일 안아주다 보면 아이들이 누군가를 깊이 안아주고 또 편히 기대어 울고 웃는 젊은이로 자라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지금은 왠지 닭살이 돋아날 것 같지만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우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젊은 남녀를 보고 난 후라 그런지 나쁘지 않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 느껴진다. 이제는 팽팽하게 당기어진 활시위 같은 삶이 아니라 느슨하게 공중에 걸린 빨랫줄처럼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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