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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Feb 04. 2024

그곳에 바선생이 산다고?

이번 겨울 방학엔 두 아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휴양지에 놀러 가기로 했다. 최근 직장 부서 이동발령으로 정신이 없기도 하고, 원체 계획형 인간이 아닌지라 남편이 솔선수범 숙소와 항공을 모두 예약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의 결정에 토 달지 않기. 뭘 타고 가던, 뭘 먹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 밥을 안 차린다는데. 어디든 무릉도원이겠다 싶었다.


휴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남편에게만 여행 계획을 맡긴 것 같아 양심에 찔려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여행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수많은 후기. 우리가 3박 4일 동안 묶을 호텔이 낙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개미는 기본이고 일명 바선생이라고 불리는 바퀴벌레들도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벌크 업한 근육질(?) 바선생이라는 제보까지. 개미에서 '오잉'하고 바퀴벌레에서 '헉'했다. 이 몸 비록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적은 없으나 지저분한 것은 딱 질색이(라고 믿고있) 었다. 그때부터 온통 숙소에 대한 악평만 머리에 둥둥 떠다녔다. 툭하면 두드러기 나고 배탈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불구덩이라도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호텔 특정 건물은 신축이라 좀 낫다는 얘기를 듣고 남편에게 룸 업그레이드를 해보자고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말만 돌아왔다. 이제 와서 어쩌겠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돈이면 국내 5성급 호텔에서 깔끔하게 2박 3일 하고도 남는 돈인데 하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착잡한 마음을 씻어내려 샤워하러 들어갔다. 샤워기에 머리를 가져다 대고 멍 때리며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다 화장실 구석에 눈길이 갔다. 저건 뭐지? 화장실 타일 군데군데 점으로 된 곰팡이가 있는 건 알았는데 새로운 녀석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물때였는데 시꺼먼 게 꽤나 징그럽게 생겼다. 최근 큰 맘먹고 곰팡이로 화려하게 장식된 실리콘을 벗겨내고 화장실 장단을 했건만. 잠시 돌보지 않으니 두 달 만에 또 이곳저곳이 거뭇거뭇 물들어가고 있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샤워를 끝낸 후 집안을 쓱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고양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커다란 먼지 뭉텅이가 문 뒤에서 자유롭게 굴러다녔고, 거실 바닥과 소파 위에는 언제 흘렸을지 모르는 과자 부스러기들이 눈송이처럼 쌓여있었다. 이것만이면 다행이게. 남편과 산 세월만큼 함께 해온 까맣고 두툼한 텔레비전 위에는 먼지가 넉넉하게 쌓여있었고, 거실 창문은 온 가족의 지문이 발자국처럼 찍혀있었다. 냉장고는 바꾼 지 얼마나 되었다고 문틈에 까만 때도 있고, 내부에도 지저분한 국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이쯤 되면 숙소 청결을 따지던 인간이라는 게 겸연쩍어진다. 평소 집이 더럽다고 못 느끼고 순도 100퍼센트의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왜 이렇게 더러운(?) 우리 집은 괜찮고 숙소는 싫단 말인가. 내가 생산한 먼지며 곰팡이는 괜찮고, 남이 생산한 건 싫은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행지 숙소에 대한 미움이 옅어졌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더러움이라는 게 내가 만든 건 좀 더 깨끗하고 남이 만든 건 덜 깨끗하고 그런 게 아닌 것을. 여행지 숙소가 좀 더러우면 어떤가. 우리 집에 있는 까만 아이들과 친구라고 생각하자. 


한층 편안해진 맘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도착한 숙소. 우리 집 실상을 깨닫고 난 후라서 그런지 내 기준 꽤 깨끗했던 숙소에서 3박 4일 동안 바선생과 하이파이브하는 일 없이 잘 지내다 왔다. 혹시 몰라 아이들이 간식 먹다 호텔 바닥에 흘리면 빛의 속도로 닦아 내긴 했지만 말이다. 


누가 그랬다. 마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손가락 하나로도 뒤집을 수 있는 종이처럼 깨끗함에 대한 내 기준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바라보는 내 마음 가짐도 가볍게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애써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늘도 먼지볼이 제멋대로 내 집에서 노니는 꼴을 두 눈 꼭 감고 외면하고 책이나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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