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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an 09. 2024

조금 슬기로운 입원생활 (2)

대기업의 도움을 받은 떡국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엄마~~ 하고 반갑게 부르며 달려오던 아이들에게 전장에 나가는 장군과 같은 비장함으로 말했다. "엄.. 엄마는 지금 복통과 싸우고 있어..."


등교 준비를 하며 누워있는 엄마를 힐끗 거리는 아이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남편이 아이들 학교 앞에 데려다주는 사이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때만 해도 진료받고 바로 출근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방 안에 출근 준비물에 책까지 야무지게 챙겨 넣고 남편의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향했다.




10분 만에 응급실에 도착하였으나, 응급실 입구에 덩그러니 놓인 베드 위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옆에는 심장이 빨리 뛰어 왔다는 젊은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숨이 가빠질 때마다 쌕쌕거렸고 나아질 때쯤 내 위가 조여오기 시작해 이번에는 내가 끙끙거렸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와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쌕쌕, 끙끙해 가며 암묵적인 의지를 하던 중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전우에게 나만 알아차릴 수 있는 희미한 인사를 건네곤 비틀거리며 입구를 통과하던 순간이었다. 내 옆으로 웬 건장한 청년이 지나가며  "저 왜 여기 있죠? 여긴 어딘가요??"라고 폭탄 발언을 하는 게 아닌가. 영화를 찍나 싶다가, 취했구 싶어 멈칫했다. 삽시간에 의료진들이 달려와 그의 양팔을 잡았고 그 사이 나는 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침상을 배정받고 누웠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잰걸음으로 오더니 몇 가지 간단한 질문과 물침대처럼 출렁거리는 배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맹장염이 의심된다며 각종 검사를 지시했다.


잠시 후, 간호 선생님이 소변검사하러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안내했다. 배를 움켜쥐고 천천히 일어나자 갑자기 휠체어를 가져오는 게 아닌가.

"아, 저 움직일 수 있어요. 괜찮아요."

"그러다 넘어지시면 큰일 나요."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뭉클한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는 계단 조심해라, 미끄럽다 수시로 말해야 하는 챙김의 위치에 있는 나이대를 지나고 있다 보니 정작 나는 평소 잘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완벽한 타인에게 들은 이 말이 한겨울 호빵보다 더 뜨끈하게 느껴졌다.


배만 아프지 사지가 멀쩡한 인간이 휠체어를 타자 몸 둘 바를 몰라 엉덩이를 들썩이며 요란하게 검사를 시작했다. 쉴 새 없이 CT며 엑스레이까지 다 찍고 응급실에 다시 돌아와서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실의 씬스틸러 기억 잃은 젊은이는 어느새 맞은편 베드에 살짝 풀이 죽어 앉아 있었다. 무료해져 살짝 그의 전화 통화 내용을 엿들어보니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일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넘어지며 뇌진탕이 왔다고 했다. 응급실에 와서 멀쩡히 CT 찍고 의료진의 질문에 답했던 사람이 잠시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이 모든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직장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부터의 일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며 자초지종을 물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연신 탄식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구나. 그도 나도 이렇게 병원 응급실에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상을 살아왔겠지.


최근 읽은 빅픽쳐라는 소설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건강은 대면대면한 친구처럼 멀리하면서 왜 나는 살이 안 빠지는가, 키가 더 컸으면 좋겠다 말로만 떠들어대던 내가 지금은 다이어트도 뭐고 배만 안 아프면 살겠다고 부르짖고 있다니.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 같은 내 모습에 가슴이 뜨끔했다.


기다림 끝에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맹장 염증은 아니나 장과 맹장이 부어 있다고 했다. 살면서 "이 녀석, 간댕이가 부었네."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요놈, 장이 부었네"라는 말은 난생처음이었다.  꽤 부어 있어 경증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니 당장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 했다. 당황한 나는 남편에게 전화 걸어 상의했고, 집에 가서 또 복통이 오면 결국엔 입원을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입원을 결정했다.  당장 아이들과 회사가 걱정되어 마음이 소란했지만 동시에 한쪽 입꼬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입원이 기쁜 일은 아닌데도 묘한 해방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나이를 먹어도 철이 없는 건지, 아이들이 꽤 자랐어도 자유에 대한 갈망은 끝이 없는 건지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안고 3일간의 입원을 시작했다.




4인실에 배정되어 주섬주섬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 동상처럼 침대에 앉아 있는데 옆 병상 할머니가 커튼 뒤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어쩌다 젊은이가 입원까지 했누. 하며 내 병상 앞 인적사항을 훑더니 반갑게 소리쳤다. "아니, 나이가 좀 있네!! 애 엄마여?" 같은 아줌마라는 동질감 때문일까. 할머니는 아예 내 병상안으로 쑥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고는 밤에 한기가 올라와 춥다며 링거를 주렁주렁 단 채로 직접 이불을 가져와 침대 바닥에 곱게 깔아주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배려는 휠체어에 이어 두 번이나 나를 휘청이게 했다. 아, 세상은 너무 따뜻하구나 하고 크지 않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감사합니다. 속이 아파서 왔어요." 말했다.


이내 각종 주사액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리고 꼼짝없이 침대에 묶이게 되었다. 일도 안 하고, 애들도 안 보고, 밥도 안 하고, 나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 꼭 남의 옷 입은 것처럼 까슬거렸다. 이내 적응했지만 말이다.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책을 펼쳤다. 얼마나 지났을 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책을 무릎에 고이 놓고 잠들어 있었다. 이래 봬도 책 좀 읽는다 하는 여인인데, '레드썬' 하고 책 펴자마자 잠드는 솜씨에 뭐라는 이 없는데도 머쓱했다. 남자 간호선생님이 항생제 테스트를 위한 얇은 주사기를 들고 서있었다. 이 와중에 선생님은 또 왜 이렇게 잘생기신 건가요.


낯선 사람들, 알코올 냄새, 수시로 체크하는 혈압, 체온. 옥신각신하는 소리는 배경음악처럼 옅어지고  조금 슬기로운 입원 생활을 위한 빠른 적응이 시작되었다.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자꾸 챙김 받고, 뭉클하고, 팔자 편히 낮잠도 자고, 잘생긴 선생님도 만나고. 2023년이 한 해  동안 고생한 나에게 떠나가기 전에 주는 호의호식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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