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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Dec 29. 2023

조금 슬기로운 입원생활(1)

8살 딸아이가 친한 친구와 즐겁게 노는 중이었다. 샛노란 공으로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 다가가니 공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엄마도 잡아봐 하며 그 공을 던졌다. 공은 가슴팍에 떨어졌고 가슴이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터치해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하게 새벽 1시. 꿈이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실제로 속이 타오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뭐지, 이 느낌은. 애써 잠을 청했지만 꿈속에서부터 지펴진 불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딸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뒤척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불이 번지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형체 없는 두 손이 정확하게 명치를 노리고 급습해 얌전히 있던 내장기관을 마른 수건 짜듯 꽉 짜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신선한 고통에 몸이 점점 말려 들어가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같은 30여 초가 지나자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음성이 들리며 명치 속을 움켜쥔 두 손이 빠져나갔다.


이게 뭐지. 설마 위경련인가. 다시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잠들어 버리자는 얕은 생각을 비웃듯 고통은 10분도 안되어 찾아왔다. 곧 끝나겠지 하며 한 시간 두 시간을 버티다 보니 어느덧 새벽 4시였다. 중간중간 화장실의 부르심까지 받았던 터라 이미 온몸은 땀에 젖었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행여 깨우기라도 할까 이 꽉 물고 소리 없이 참고 있다 한계치에 다다랐다. 비틀거리며 베개와 이불을 가지고 거실로 나와 매트에 누웠다. 그리곤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또다시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고통의 간격은 여전히 10-15분 간격이었고, 당장 뛰쳐나가 택시 타고 응급실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탈진 상태의 몸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방에서 혼자 자고 있는 남편을 떠올리다가 남편 출근이며 아이들 등교며 생각할게 많아 그만두었다.


사실 그 시점에는 응급실이고 뭐고 따뜻한 물 한 모금이 가장 절실했다. 내 몸은 이미 등이 굽은 한 마리의 새우가 되어 매트 안에 녹아들어 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새벽 5시경 남편이 안방 화장실에 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회다! 하지만, 잠귀가 밝은 아이들 다 깨도록 크게 소리 내어 남편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평소에도 귀가 밝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래, 텔레파시를 보내자. 남편, 자네의 사랑을 시험하겠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화장실에 들렀다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와보게. 하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여자가 미쳤나 할 이야기지만 몇 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 있다 보니 살짝(아니면 많이?)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 남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남편, 남편! 남편편!! 조용한 처절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사락거리며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옅은 탄식을 내뱉으며 읊조렸다. 아, 써글.


새벽 6시 40분이 되자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눈을 반만 뜬 상태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드디어 나는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인가!! 기대감도 잠시, 남편은 매트 위에 걸레자루처럼 널브러져 있는 나를 지나쳐 정수기에서 유유자적 물을 따라먹었다. 어이가 없어 푸르스름한 어둠을 뚫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다시 움직였다. 드디어 나를 봤구나. 아니었다. 남편은 뒤통수를 긁으며 이번엔 아들 방 문을 열고 잘 자는지 확인했다. 참다못한 나는 끙끙 소리를 내며 그를 불렀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남편이 내 곁으로 왔다. 빨리도 왔다. 쯧쯧. 사실 남편은 잘못이 없다. 근본 없는 텔레파시를 보낸 내가 잘못이고, 새벽에 아내가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내 몸이 기막히게 아프고 보니 그저 신경질이 났나 보다.


왜 그러냐는 남편의 물음에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물'이라고 말했다. 입안과 목구멍이 바싹 말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못 알아듣고 '뭐라고?'라고 물었다.

무울 / 뭐? 무?? (지금 무를 찾겠냐!)

무~~~ 울 / 뭐라고?

무울 / 뭐?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남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아, 나의 부족한 인격 수양이여. 우리는 마치 칼과 방패와도 같은 '물과 뭐'의 싸움을 약 15번 이상 주고받았고 지쳐 떨어져 나간 남편이 핸드폰을 보여 주며 카톡을 하라고 했다. 물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여인에게 지금 핸드폰으로 물이란 글자를 치란 말인가. 그제야 젖먹이 시절을 떠올리며 물!!!!!이라 외칠 수 있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선 무엇이든 해낼 수 있구나를 다시금 경험하며 물 한 모금을 얻어마실 수 있었다.


물을 마시니 기력이 나는 듯했다. 남편에게 말했다. 애들 학교 보내고 병원에 다녀오겠노라고.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보고 사마리아 여인에 빙의한 남편은 늦게 출근하겠다며 응급실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남편이 귀여워 보이며 내친김에 아침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팬트리에 누룽지가 있을 거라며. 남편은 허겁지겁 누룽지를 찾기 시작했지만 거실에 누워서도 보이는 그것이 두 다리가 자유로운 남편의 눈에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부엌까지 기어가 누룽지를 찾아주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자애로운 아내의 미소를 머금고 다시 고통 속에 빨려 들어가는데, 갑자기 누룽지를 사놓은지 꽤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유통기한을 확인하거라. 지령을 내리니 돋보기를 주섬주섬 꺼낸 남편이 날짜를 확인하고는 외쳤다. 23년 9월!

에라이. 그럼 플랜 B. 서랍 안에 비비고 설렁탕과 냉장고 떡국떡을 꺼내 떡국을 끓이라고 아바타에 지시했다. 이 아바타는 분명 같은 파란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어딘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냉장고를 열고는 떡국의 위치를 눈으로만 스캔하는데 떡국이 제 발로 걸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검은 봉지를 찾게. 현자처럼 한 마디 던져주니 그제야 멀쩡한 두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떡국은 찾았다. 다음 관문은 비비고 설렁탕 찾기였다. 정수기 아래 하부장에 레토르트 식품을 쟁여놓은지는 수년이 지났지만 그곳은 남편에겐 비밀 동굴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정수기 아래, 아래! 를 외쳤지만 아련하게 정수기 바닥만 바라보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는 남편을 보며 내 눈도 흐려졌다. 결국 또다시 온갖 바닥 먼지를 쓸어 담으며 기어가 비비고 설렁탕 국물을 꺼내주었다. 이제 내 소임을 다했소.라는 심정으로 난 또다시 깊은 심연의 바닥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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