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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Dec 10. 2023

식지 않는 뚝배기에는

아침 메뉴는 된장찌개로 정했다. 전날 빠르게 냉장고를 훑어본 후 메뉴를 정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오래된 뚝배기를 꺼내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뚝배기를 올린 인덕션을 작동시키고 물을 뜨러 간 사이 경고음이 들렸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인덕션을 껐다 다시 켜보았다. 여전히 경고음이 울리는 순간 깨달았다. 아, 이 뚝배기는 인덕션용이 아니구나.


얼마 전,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교체하면서 프라이팬이나 냄비는 인덕션용으로 구비해 두었는데 뚝배기가 사용 불가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바쁜 출근 준비시간임에분주히 움직이던 손과 발을 멈추고 뚝배기를 잠시 바라봤다. 13년 동안 동고동락 했던 물건인데 이제 보내줘야하나는 생각에 마음이 일렁였다.




13년 전, 결혼 직후 집들이를 했다. 남편이 출장 간 날, 고등학교 친구 셋을 불렀다. 꽤 높은 언덕 위에 있던 우리 집에 오기 위해 친구들은 역에서부터 택시를 탔고 친구들이 내리는 곳에 버선발로 마중 나가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는 친구들  양손에 휴지며 과일이며 한 가득인데 한 친구 팔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짐을 건네받으며 뭔데 이렇게 무겁냐고 물으니 친구가 말했다.

"엄마가 너 주라고 싸주셨어. 그릇 같던데?"

집에 올라와 뜯어보니 빨간색 뚜껑이 매력적인 뚝배기 2개였다. 친구 어머님께 바로 전화드렸다.

"내가 살아보니 괜찮은 뚝배기는 꼭 필요하더라. 맛있는 거 해먹으라고. 원래 내가 가까이 살면서 너 음식도 해먹이고 해야는데 미안하네."


애써주신 마음이 감사해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지만 사실 그때만 해도 뚝배기가 그리 유용할 거란 생각은 없었다. 초보 주부의 섣부른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뚝배기는 우리 집에서 전천후로 활약하며 주방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친구 어머님은 이십여 년 전부터 엄마처럼 날 보듬어 주어 왔다.

첫째와 둘째 출산 직후 바쁜 일 제쳐두고 아픈 무릎으로 병원까지 먼 길 와주신 것도 그분이었다. 하루는 설연휴 마지막 날에 어머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몇 시간 후 발견한 메시지에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아이들 선물 놓고 간다고. 괜히 연락하면 가뜩이나 분주한 네가 신경 쓸까 봐 보고 싶은 마음 담아 직접 가져온 선물을 문 앞에 놓고 간다고.


왕복 세 시간이 훌쩍 넘었을 거리를 오가신 어머님 생각에 코끝이 매웠다.


이렇게까지 딸 친구를 품어주는 어머님의 맘은 무엇일까.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을 생각할 때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듯 느슨해졌다.




서둘러 아무 냄비나 꺼내 된장찌개를 끓이며 외롭게 놓인 뚝배기를 바라보았다.

한낱 물건에 이리 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이상스러웠지만 차가워진 뚝배기에 손을 대기만 해도 겨진 추억이 뜨끈히 전해졌다.


사진을 찍으며 함께한 지난 13년을 뒤돌아본다. 작은 뚝배기에 봉긋이 올라온 포슬포슬 계란찜을 입에 덕지덕지 묻히고 먹던 아이의 모습이. 큰 뚝배기에 콩나물 팍팍 넣어 해장 김칫국을 끓여주니 커어 소리 내며 한 뚝배기 하던 남편의 모습이. 딴짓하다 뚝배기에서 국이 넘쳐흘러 궁시렁하던 내 모습이. 빈 뚝배기안에 가득 담겨 넘쳐흐른다.


뭔지도 잘 모르고 엄마가 손에 쥐어준 무거운 뚝배기를 이고 지고 들고 온 친구의 마음이.

친정 엄마가 누워 있어 여러 모로 허술할 새댁의 주방을 제대로 채워주고 싶어 시장에서 우직한 놈들을 골라 사 왔을 친구 어머님의 마음이.

십수 년간 사용할 때마다 그들을 묵직하게 생각하던 내 마음이.

한데 데워져 뚝배기안에 잔열처럼 뭉근하게 남아 있다.


뚝배기를 더 이상 인덕션에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은 차마 보낼 수 없어 찬장에 도로 모셔 두었다. 너희들을 어쩐다니.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곱씹고 난 후에는 보내줄 수 있으려나.


식지 않는 뚝배기를 보내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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