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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Dec 03. 2023

기사님의 이유 있는 호통

직장 셔틀버스 기사님 중 무서운 분이 있다.

좌석 예약제라 버스에 오를 때 예약번호를 불러야 하는데 잘 안 들리면 버스 안이 다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뭐라고??? 작아서 안 들려!!"하고 소리친다. 신경질인지 그저 목소리가 큰 것인지 분간은 잘 안 가지만 당한 자들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다. 교직원이나 학생에게나 공평하게 호통친다는 점은 다행이다. 이런 모습을 몇 번 목격하고는 타기 전에 번호를 확인한 후 내가 이 구역의 아나운서다 하는 심정으로 또박또박 번호를 부르고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기사님을 통과한다.


하루는 직장 동료가 셔틀버스에서 기분이 나빴다며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급하게 회의가 잡혀 좌석 예약을 못한 터라 자리가 남길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탔는데 "왜 예약을 안 했어요!!! 담에는 꼭 예약을 좀 하세요!!" 하고 매몰차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자리가 남는 경우에는 미처 예약을 못한 사람을 태우는 게 당연한 시스템인데 뭐라고 한 것도 속상하고, 큰 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혼을 내듯 말해 민망했다 한다. 기사님에 대한 데이터가 쌓일수록 셔틀을 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곤 했다.




월요일이었다. 화수분처럼 뿜어져 나오는 업무에 외부 야근이 밤까지 이어져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바람은 매섭게 불고 다리는 퉁퉁 부어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고 버스에 올랐다. 그날따라 좌석 번호가 1번이라 기사님과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앞차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운전을 저따위로 하면 차를 끌고 나오지 말아야지, 바람은 왜 이리 세게 불고 난리냐며 구시렁거리는 기사님 혼잣말 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기사님이 갓길에 버스를 세웠다. 잠이 확 달아나며 무슨 사고라도 났다 걱정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버튼을 탁탁 누르자 어둡던 버스가 환하게 밝혀졌다. 급작스러운 정차와 눈부심에 현실 파악이 안 되던 그때. 기사님이 외쳤다. 그 특유의 걸걸하고 거친 목소리로.

"지금 기침하는 학생 누구야!!!???"

버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직원으로서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왜 이러세요 기사님 진정하세요 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그가 내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좌석 위에 붙어있는 서랍장을 열고 부스럭 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계속 기침을 하던 학생이 또 기침을 했다. 바로 내 대각선 뒤에 있는 학생이었다. 서랍 안을 뒤적거리던 기사님이 고개를 홱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학생이야????"

또다시 얼음. 도대체 내 머리맡에서 뭘 꺼내는 건가 당장이라도 일어나야 하나 싶어 안전벨트에 손을 대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서랍장에 들어간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10여 초가 1년 같이 흐르고...


그의 손에 딸려 나온 물건의 정체는 바로!

순진해 보이는 하얀 종이컵이었다. 뭐지? 전혀 위협적인 물건이 아닌데. 모두의 정신을 마비시키며 기사님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기침할 때는 뜨신물을 먹어줘야 하는 거야." 하며 버스 앞쪽 선반에 놓인 보온 물통 버튼을 터프하게 누르더니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받았다. 거칠지만 친절한 느낌으로 그 학생에게 물을 건네곤 "더 필요하면 와서 떠먹어!"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운전석으로 돌아가 불을 끄고 다시 버스를 몰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앞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는 눈빛 교환을 하며 어리둥절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잔뜩 힘을 주고 안전벨트를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알고 보니 몹시 다정한 마음을 가졌던 기사님을 잠시나마 의심했다는 사실이 죄송했지만 한 마디 드리고 싶었다.

'기사님, 불을 고 누구야!!! 했을 때는 진짜 어린 시절 전설의 고향 볼 때처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요. 인류애는 감사하지만 목소리 음량 아주 조금만 낮춰주세요' 하고 말이다.




살다 보면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뿔이 났을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나한테 신경질일까. 조금만 더 친절하게 해 주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정의 온도는 모두 다르다. 나와 온도는 다르지만 또 때론 서툴고 어색하긴 하지만 마음만은 따스한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거칠고 까칠한 말 너머에 숨겨진 진심이 있을 수 있음을.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그 시간은 어쩌면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 탓에 길어 보이는 것뿐이라고. 사실은 그게 알맞은 속도일 수도 있으니 한 번에 타인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며칠 후, 또다시 탄 셔틀버스에서 같은 기사님을 만났다. 어리숙한 발음으로 10번라고 말하며 버스에 올라타는 학생에게 "추워!!! 목도리라도 하고 다녀!! 그러다 얼어 죽어!!" 하며 무시무시하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을 들었다. 그의 정다운 공격에 당한 학생이 누구인가 슬쩍 머리를 빼꼼 내밀어 바라보니 외국학생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는 학생을 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학생도 아저씨의 거친 매력을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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