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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Nov 19. 2023

만원의 행복

만화방에서 만화만 보나요

그런 날이 있다. 지구로 떨어지는 운석처럼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주우려 손을 뻗으면 야속하게 굴러간다. 서둘러 쫓아가지만 끝도 없는 어둠 속을 지나더니 이내 새까맣게 출렁이는 바닷속으로 빠져 버린다.

 

아침에 학교 생활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는 첫째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가 그랬다. 최근 일이 많이 바빠 아이들에게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터라 죄책감에 흔들리는 마음이 잘 잡아지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고 아이와 더 시간을 보낸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나의 처지가 가시덤불 같다.


끝도 없이 암 속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애써 외면하며 수면 위로 올라온다.

순간, 파아하고 잠시 숨이 쉬어진다. 다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 허우적거리다 맑은 목소리를 내며 아웅다웅하고 있는 남매 덕분에 현실로 돌아왔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마법이 있다.

바로 만화방! 요즘은 세련되게 만화카페라 부른다지만 우리 집에서는 무조건 '만화방'으로 통한다.

"어린이들~오늘 아빠도 없고 심심한데 만화나 보러 만화방 갈 사람 손~"

"저요, 저요!!"

걸려들 줄 알았다. 흑심은 숨긴 채 선심 쓰는 척해본다.

"대신 딱 2시간 만이다~"

작은 도로 하나만 건너면 있는 만화방에 순간이동 한 마냥 도착했다. 자주 왔더니 아이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척척이다. 신발장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신발장 열쇠를 카운터에 맡기며 만수르처럼 외친다.

"B콤보 셋이요~"

B콤보는 만화 2시간 + 음료 조합이다. 이 녀석들, 음료는 사준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자연스러웠다.


각자 좋아하는 만화책을 골라와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 공간에 배를 깔고 누워 보기 시작했다. 이내 키득거리는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오고 난 잠시 그 소리를 즐긴다.


작년에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만화방을 방문했다. 어릴 적 자주 가던 만화 대여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규모에 마사지 의자, 복층 구조까지 갖춰진 모습을 보고 아이들도 나도 서울 처음 구경 나온 사람들처럼 두리번거렸다. 그때는 신이 나 평소 관심 있었던  '유미의 세포''오므라이스 잼잼' 같은 만화책을 열내며 읽었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만화방에 만화를 보러 오지 않는다.

낄낄거리는 소리를 BGM으로 들으며 잠시 눈을 감고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기도 하고 배를 깔고 누워 있기도 한다. 집에서 누워 있으면 아직 가벼운 한 녀석은 올라타고, 무거운 녀석은 옆에 바싹 붙어 쉴 새 없이 떠든다.

만화방에서 누워 있는 에미는 그저 통나무다.


20분 정도 눈을 붙였다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아이들을 부른다.

"자 골라보자, 엄마는 썬칩"

빠질 수 없는 간식 시간이다. 아이들은 취향껏 매운 새우깡, 홈런볼을 고른다. 과자를 시원하게 씹으며 따로 가져간 책을 읽는다. 아이들이 만화책에 집중해 있을 때 아이들 과자를 몰래 집어 먹는 게 나만의 작은 재미다. 집에 있으면 책 한 장 읽으려 해도 세탁기 종료음이 정신 산란하게 하고, 아이들이 이유 없이 흩뿌리는 종이조각이며 과자 봉지가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여기는 괜찮다. 만화방은 다 용서가 된다. 한 가족이 쓸 수 있는 공간이 작아 까짓 거 나가기 전에 1분이면 치우고도 남는다.


1시간이 지나면 만화방의 꽃, 라면 식사 시간이다. 분식집 라면보다 더 맛있는 곳이 있다는 걸 작년 만화방에 오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반까지 추가하면 주말 한 끼 해결이다.


만화방에서는 뭐든지 내 마음이다. 이 책 읽다 저 책 읽어도, 중간에 책을 그만 읽어도 뭐라는 이 하나 없다. 누워서 자도 되고, 자기가  가져온 책을 읽어도 되고. 때로는 글을 쓰는데 당연히 말리는 사람도 없다. 과자 먹고 라면을 신나게 먹어치워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긴 원래 그런 이니까. 쓸고 닦으며 청소할 것도 없고 쓰레기만 잘 정리해서 카운터에 주고 가면 몸 가볍게 나올 수 있다. 요즘 외식하면 인당 15000원은 기본인데 만화방에서는 배 두들기며 나와도 만원이면 충분하다. 만원의 행복이다.




사는 게 내 맘 같지 않을 때. 내 인생도 내 맘대로 안되는데, 피와 살 같은 아이들 인생이 또 맘 같지 않을 때.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듣는 거, 같이 맘 아파해주는 것 밖에 없을 때. 그래서 마음이 몸속을 빠져나와 알 수 없는 곳으로 끝도 없이 굴러내려 갈 때.

만화방에 와서 나는 숨을 쉰다. 이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것들도 있기에.

숨을 쉬자 비로소 바닥에 깔린 마음이 보인다.


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시원하게 한판 물을 내뿜으며 숨을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만화방에 다녀온 나는 한 마리의 고래가 된다. 물속에 빠진 게 아니라 유영하는 내가 된다. 아직 숨쉬기가 서투른 아이 손을 잡고 가로질러 나아가본다. 숨 쉬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나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사진출처: unsplash,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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