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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Nov 28. 2023

도넛 수혈이 필요해

달 전, 애정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 님의 전시회 얼리버드 티켓을 2장 샀다. 누구와 갈지 정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스케줄에 맞춰 가장 데리고 가기 쉬운 사람은 아들일 것이라는 어렴풋한 예상만 있었을 뿐.




말 그대로 '어어어' 하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일상을 보내다 정신 차려보니 첫째 생일이 코앞이었다.

쌈박한 생일상을 준비하지 못해 초조해지던 찰나 전시회가 떠올랐다. 생일에 맞춰 아들은 체험학습을 나는 휴가를 내고, 전시회에 갔다가 근처 브런치 맛집에서 아들은 햄버거를 난 와인 한잔을 시켜 먹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라 완벽한 일정이다 싶었다. 몸에 찌르르 전류가 흐르며 기분 좋은 흥분이 시작되었다.


남편에게 신이 나 계획을 알렸다.

'굳이? 왜? 난 별로...'

그의 말에 한껏 부푼 마음은 구멍이 나 맥없이 바람이 빠져나가며 쪼그라들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 둘이 번갈아가며 자주 아파 남은 휴가도 별로 없는데 하루 서울 나들이라니. 이보다 더한 사치가 있을까. 

알면서도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주말에 가라는 남편 말에 반항했다. 엄마 껌딱지인 둘째가 오빠와 긴 시간 데이트 다녀오는 걸 순순히 보고만 있을 리 없다. 어쩌다 무사 탈출한 날도 '언제 와. 언제 와. 언제 와.'로 시작하고 끝나는 문자를 무한대로 보내는 통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일쑤였다.


사십 평생 넘게 살며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에 아들에게는 당일 아침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얘기했다가 못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뒷수습이 감당이 안되니까.




생일 하루 전이었다. 다음 날 휴가낼 생각에 손에 모터 달고 키보드를 연신 두드리고 있던 그. 때. 둘째를 하교시킨 이모님의 긴급 연락을 받았다.

"OO 컨디션이 아주 나빠요. 열도 많이 나고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계획형 인간은 전혀 아니기에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에 대단한 슬픔은 없었다. 그저 아들과 맘 편히 하루종일 붙어있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안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며칠간 선잠 자며 병간호할 생각에 한숨까지 더해졌다.


결국, 다음 날 휴가를 내긴 냈다. 고열이 나는 둘째를 돌보기 위해.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아 들고 나오는 맘이 무거운 징 같았다. 옆에 축 늘어진 아이를 보며 맘이 더 산란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집에 가는 길에 간식 사가자. 뭐 먹고 싶어?"

"도넛!"


집으로 돌아와 도넛 상자를 열었다.

아이는 손뼉 치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 커피를 내리고 아이와 도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퐁신한 도넛을 베어 물자 달짝지근한 설탕물이 입안에 서렸다. 입에 설탕 코팅이 잔뜩 묻은 아이 입술을 닦아주며 "맛있어?"하고 묻는 소리가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는 아이는 더더더 좋았다.

도넛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나란 인간 너무 단순한 사람인가 싶다가도  하나에 좋아질 수 있는 것이 마음이라는 게 또 좋았다.


오후에는 잠시 이모님께 둘째를 맡기고 하교하는 첫째를 태워 간식을 먹으러 갔다. 전시회 계획을 모르던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회사에 있어야 할 엄마가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니 싱글벙글이었다. 아이가 고른 닭강정을 나누어 먹으며 끝이 없는 수다를 듣고 있다 문득 깨달았다. 이곳이 전시회구나. 아이가 말하는 하루를 바람결에 흘려보내지 않고 온몸으로 꼭꼭 씹어 담아내고, 기적 같은 그 순수한 얼굴을  분주함으로 가리지 않고 두 눈에 쏙 담을 수 있는 이곳이 말이다.




아들과 짧지만 달콤했던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왔더니

둘째 체온은 39도 아래로 내려갈 줄을 몰랐고,

멀쩡하던 첫째 컨디션도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남아있던 도넛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썼다 달았다 하는 하루지만 단맛을 기억하려 애쓰며 또 한입 베어 물었다.

쌉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설탕물 뒤집어쓴 도넛을 먹으면 씁쓸한 맛이 사라지는 것처럼, 

오늘자 쓴 맛을 잊기 위해.


달콤함에 기대어 또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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