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은 집에서도 계속된다. 퇴근 후, 아이들과 격한 인사를 잠시 나누고 나면 밥 준비 할 테니 알아서 놀고 있으라 하고 잠시 이별을 고한다. 둘 다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제법 즐긴다. 2년 전만 해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팔다리에 코알라 새끼들처럼 매달려 있던 녀석들인데 많이 컸다고 되뇌며 신속하게 저녁밥상을 준비해 본다.
아이들과 남편 밥상은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로 정했다. 계란 휘휘 풀어 냉장고 털어 나온 야채를 송송 썰어 계란말이 준비하고 물을 끓기를 기다렸다. 아직 배고프지 않다는 아이들의 반가운 소리에 서둘러 혼밥을 준비했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먹는 것도 좋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은 혼자 먹으려 한다. 같이 먹다 보면 아이들 말에 대꾸하랴 밥 더 달라는 요청에 굼뜬 몸 움직이랴 꽤 분주하다. 어떤 날은 그것이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빴던 날이었다. 온몸이 너의 시간을 가지라 촉구하고 있었다.
프라이팬에 평소 아끼는 들기름 듬뿍 둘러 계란 프라이를 튀기듯 부치고 비엔나소시지를 물에 데쳤다. 퇴근길 들른 마트에서 푸릇함이 매대를 삐죽삐죽 뚫고 나오던 쪽파가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자주 해주던 쪽파무침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다. 살짝 데쳐 다진 마늘, 액젓, 참기름, 통깨 넣어 5분 만에 만들었다. 쪽파와 짝꿍처럼 나란히 놓여 있던 마늘종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늘종 제철이 아닌가. 반은 파스타용으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간장양념으로 휘리릭 볶았다. 원래는 매운 청양 고추파이지만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자 오이고추가 당겼다. 먹보인지라 그냥 시판 쌈장에 찍어 먹는 건 성에 안 찬다. 다진 마늘 조금, 참기름, 매실액기스, 참깨 넣어 준비한다. 김치를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다가 노란 통단무지를 발견했다. 먹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사십 대 '어른이'이기도 하지. 갑자기 단무지 무침이 먹고 싶은 게 아닌가. 얼른 썰어 물에 담가 넣고 양념을 준비했다. 데치고 남은 쪽파 썰어 고춧가루, 설탕, 다진 마늘, 참기름 넣은 양념장에 투하했다. 샤워하고 나온 단무지에 입혀주니 태양처럼 빛나는 주황빛 자태에 침이 줄줄 흐른다. 아이들 주려고 만들어놓은 단짠단짠 멸치볶음도 조금 덜어 놓았다. 내 뼈는 소중하니까.
다 차려놓고 사진을 찍으니 혼자 웃음이 난다. 세상 어린이 입맛 반찬과 어른 입맛 반찬이 만났다. 지인들 사이에 '초딩입맛'을 가진 자로 유명하다. 회, 곱창, 순대 간, 선짓국 등은 못 먹고 탕수육, 김밥, 튀김, 햄, 과자를 좋아하는 탓이다. 친구들 모임이나 회식 하러 가면 놀림당하곤 하지만 어린이 입맛이라는 게 어쩐지 상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20대까지만 해도 평생 안 늙을 거로 생각했다.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40대는 생각보다 빠르게 준비하기도 전에 찾아왔다. 10대, 20대의 특권과도 같았던 일들. 이제는 엄두도 못 내는 일이 많다. 할 일 제쳐 두고 무작정 놀기,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기대기. 친구들과 날밤 새우며 수다 떨기. 수업 빼먹고 늦잠 자보기. 웬만하면 아프지 않은 단단한 몸 믿고 부어라 마셔라 하기. 지금의 나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떨린다.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낯선 삶의 길을 굽이굽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저만치 뒤에 예전의 내가 허물처럼 벗겨져 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 어린 시절 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 그때의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 좋다 나쁘다 따질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탕수육이나 햄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내가 마흔의 몸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중력을 피하지 못한 피부는 내려앉고 파뿌리같이 흰머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오고 떠날 줄 모르는 두둑한 뱃살을 품은 이 몸 안에 동심을 품은 마음이 공존한다는 게 꽤 큰 위로가 된다. 많은 것이 변해 온 지금, 변치 않는 내 어린이 입맛이 할머니 될 때까지 함께 한다면 마음이 한 스푼이라도 어려지지 않을까. 케첩에 소시지를 푹 찍어 먹으며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