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떤 목적이 있어서 혼밥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유난히 혼밥이 당길 때가 있다. 근심거리가 있거나 수고한 나를 위해 주는 선물 같은 혼밥이 말이다. 며칠 전, 이 날도 그랬다. 회사 일이 내 맘과 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한다고 하는데 엉킨 실타래처럼 상황이 자꾸 꼬이고 꼬여 진흙탕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별문제 없이 잘 굴러갈 때는 회사 다니는 일이 그럭저럭 괜찮다가도, 위기에 봉착하면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까지 이른다. 그렇다고 홧김에 관둘 수도 없으니 이런 날은 유일한 희망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11시 59분. 12시 땡. 갈 길이 먼 보고서 흰 바다 위 커서를 홀로 외로이 깜박이도록 내버려둔 채, 비정한 여인 빙의하고 의자를 박차고 나간다. 총알보다 빠른 솜씨로.
오늘은 무얼 먹을까. 일단 먹어본 음식 중 고르기로 했다. 괜한 모험을 했다가 맛이 없다면 남은 반나절을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전장에 나간 장군처럼 비장함을 가득 안고 식당가로 출발했다. 스트레스엔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맵거나 이빨이 시릴 정도로 단 음식이 제격이다. 짧은 고민 끝에 매운 음식은 저녁 메뉴로 아껴두고 달달이로 정했다.
분위기가 좋아 가끔 힐링하러 가는 팬케이크 가게가 생각났다. 퐁신퐁신한 수플레 팬케이크를 파는 곳이다. 일반 팬케이크는 몇 개 먹다 보면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수플레 팬케이크는 꿀떡처럼 쑥쑥 잘도 넘어간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조명이 나를 반겼다. 자칭 이 구역 대식가로 보통은 소시지가 포함된 세트를 시키지만 이 날은 팬케이크만 먹기로 했다. 목표는 단 하나. 배부름이 아닌 힐링임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언제나 반가운 진동벨이 울리고, 내 몫의 팬케이크를 받아 왔다. 의식을 치르기 전 함께 시킨 쌉쌀한 커피로 입 안을 헹구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비어 있는 위를 예열시켰다. 포크를 옆으로 세워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겉면을 살짝 두드렸다. 구릿빛으로 잘 구워진 표면은 단단했지만 부드러운 속살은 감출 수 없었는지 물침대처럼 출렁였다. 시럽을 뿌리기 전 순수한 팬케이크를 맛보고 싶었다. 버터가 녹아든 팬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자 씹을 필요도 없이 사르르 녹았다. 오전에 쌓였던 스트레스도 함께 녹아내렸다. 공기반 계란 반인 맛이랄까. 다음에는 시럽을 평소보다 듬뿍 뿌려 한 입 베어 물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기 주먹만큼 큰 한 조각을 삼켰는데 눈떠보니 입 안에 촉촉함만 남기고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천천히 세 덩이의 수플레 팬케이크를 음미했다. 팬케이크가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진 듯했다. 이제 됐다. 이 정도 달달함과 부드러움으로 장착하면 오후에 몰아칠 파도 따위야 잘 물리칠 수 있을 거다.
엄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웠던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울다 지쳐 졸다 또 울다가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룸메이트는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필리치즈샌드위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슬픔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잘 먹고 기운차리라고. 억지로 끌려간 식당에서 아이러니하게 생애 최고 샌드위치를 맛보고 마음을 추슬렀다. 힘들 때 먹는 좋은 음식은 위뿐만 아니라 용기도 채워준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 삶의 길목마다 장애물이 나타나 몇 보 후퇴하게 만들지만, 잘 먹은 밥 한 끼가 주는 소소한 행복감으로 충전하면 다시 앞으로 나갈 힘을 얻는다.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도 결국 나아가니 되었다 싶다.
달달한 갑옷 장착하고 사무실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전투할 태세를 갖추었다. 온갖 방해와 어려움이 쏟아져 넘어지더라도 일어날 힘이 생겼으니 용기 내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