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 옷

by 익명의 에세이

완연한 여름날씨에 작년에 입었던 옷을 꺼냈다.

작년 냄새가 한껏 묻어 있는 옷을 털다 문득

입기 싫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분명 이 옷을 처음 사고, 입고, 나가

한껏 기분 좋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겨우 작년 일이다.

하지만 올해는 입기 싫다. 마음이 변했다.


작년의 옷은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린 이후

색이 바래거나 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때로는 다른 옷들이 선택되어 세상 밖으로 나갈 때마다

부풀었던 기대감은 부푼 만큼 실망으로 돌아왔지만,

옷은 아직은 자신의 차례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시 언젠가 자신을 입고 나가기에

적당한 날씨가 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옷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옷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 마음이 변할 줄은 몰랐다.

최고로 적당한 날씨가 왔지만 옷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옷은 여전히 주름 하나 없이 판판했고,

옷을 이루는 실들은 힘 있게 촘촘했다.

작년 모습 그대로 예뻤지만

옷은 끝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옷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고,

정확히는 나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옷은 나를 원망하지 않는 대신

여전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자리 그대로, 최선을 다해 기다리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옷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전과 같지 않게 색이 바래고 해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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